기분 나쁜 일이긴 하지만 대표적인 친일파 이완용(1858∼1926)은 전북과 인연이 깊다. 경기도 광주 출신인 이완용은 구한말인 1898년 전라북도 관찰사(지금의 도지사)를 지냈고, 인생 끝까지 일제에 기생하다 죽어서 묻힌 곳 또한 익산이었다.
이완용이 전라북도에 내려와 관찰사를 지낸 것은 친러파로 몰려 외곽을 전전하던 때였다. 1896년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시킨 공로로 박정양 내각의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에 취임하는 등 승승장구했으나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친러파로 몰려 좌천인사를 당한 것이다.
이완용의 공덕비가 한때 부안군 줄포면 면사무소 후정에 세워져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 연유는 이렇다. 1898년 가을 밤, 갑자기 큰 해일이 들이닥쳐 줄포지역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잃고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다. 줄포항의 배들은 지금의 십리동 마을과 장동리 원동 마을의 똥섬으로까지 밀렸다. 이완용이 전라북도 관찰사가 되어 부안 변산구경을 나섰을 때의 일이었다.
이완용은 줄포에 와서 이같은 참상을 살피고 부안군수 유진철에게 난민구호와 언뚝거리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다. 제방은 견고하게 수리됐고 오늘의 대포가 생겼다. 이후 일제때 서반들 매립공사가 이뤄져 오늘의 줄포시가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난 이듬해 부안군수와 주민들은 이완용의 구호사업을 기리는 비를 장승백이(지금의 장성동)에 세웠다. 이른바 공덕비다. 하지만 광복과 함께 매국노를 칭송하는 이 비는 수난을 맞았다. 이 비석은 개인에 의해 보관돼 오다 1973년 당시 줄포면장 김병기씨가 3,000원에 구입, 줄포면 면사무소 후정에 세워 놓았지만 1994년 ‘일제 잔재 없애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철거됐다. 지금은 줄포면사무소 지하 창고에 반파된 채로 보관돼 있다.
친일의 댓가로 당시엔 화려한 삶을 살았을지언정 역사는 비석까지도 가만두지 않고 있다. 지하 창고에서 쪼개진 채 나뒹글고 있는 공덕비가 역사의 준엄한 심판임을 말해준다.
얼마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회가 친일파 9명의 재산(36억)에 대해 국가 귀속 결정을 내렸다. 이완용의 토지는 1만4912㎡로 0.09% 밖에 안된다. 친일에 대한 추적과 심판은 계속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