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따구리] "이세종이 누구죠"

“오늘 도청에서 노브레인 공연 있는데, 노브레인 앞에 이세종인가 뭔가 공연한데. 아, 재수없어.”

 

‘이세종’이란 이름 석자에 가슴 먹먹해 지는 사람들. 그러나 ‘노브레인’은 알아도 ‘이세종’은 모르는 지금 세대들에게 ‘이세종’은 짜증나는 이름일 뿐이다.

 

17일 전북도청 야외공연장에서 열린 ‘5·18민중항쟁 제27주년 문화제’. 5·18 관련 최초의 사망자인 고 이세종 열사 추모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날 모인 관객들은 400여명 정도. 5·18 이후 세대들과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브레인과 같은 인디밴드들을 불렀지만 주최측이 기다렸던 중·고등학생들은 50여명 안팎이었다.

 

한 대학교수는 이 시기만 되면 어떤 과목이 됐든 5·18과 관련된 이야기들로 수업을 진행한다. 올해도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5·18을 힘주어 말했던 그는 문득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틈만 나면 6·25를 꺼내시던 당신의 아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6·25가 지금 아이들의 5·18처럼 아득했기 때문이다.

 

올해도 전북대 이세종 열사 추모비 앞을 많은 젊은이들이 지나쳤을 것이다. 80년도에 태어난 수많은 99학번들도 그렇게 추모비를 지나쳤었다. 군화발과 학생들의 함성소리가 뒤섞였던 1980년 5월을 모른 채 캠퍼스에 들어온 기자 역시 그랬었다. 이세종 열사가 죽음을 맞았던 스물한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열사’란 말이 슬픔의 단어였음을 알게됐다.

 

한 해가 또 지나갔다. 아직 5월이지만, ‘그 해 오월’을 보낸 이들은 5·18을 지내고 나면 한 해를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민주화 투쟁을 이끌어 가던 젊은 사상가도 아니었고 신군부를 압박하던 반정부 인사도 아니었지만, 거리 위로 쏟아져 나왔던 평범한 학생, 평범한 시민들. 그 때 그 사람들에게 기자는 미안해지는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