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에게도 책 한 권이 던져졌다. 이끼 짙은 개울물빛의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소나무·1992). 아쉽게도 ‘금서’는 아니었다. 각주가 반 이상을 차지하는 논문식 구성, 경제사 중심의 서술, 한없이 딱딱하고 늘어지는 문장. 그러나 공식 출판물이었던 이 책은 한반도의 숨겨진 진실을 너무도 명확하고 강렬하게, 차분하고 입체적으로 이해시켰다.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는 고(故) 박현채 교수(조선대)를 비롯해 박명림 김혜진 양동주 공제욱 김동춘 김광덕 허상수 등 정치학·경제학·사회학을 전공한 당시 소장학자들이 1945년부터 1991년까지 분단 50년의 현대사를 시기별로 심층 조명한 책이다. 대부분의 다른 저작들과 달리, 민족과 계급의 이분법적 시각을 넘어 거시적인 안목에서 접근한다. 뒤틀린 역사, 그래서 좌절과 분노로 점철된 역사를 감성적 차원을 넘어 투명한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우리 현실에 기반한 역사의 흐름을 서술해 간다. 왜곡된 역사에 대한 단순한 분노가 논리를 갖추게 되고, 내 주위를 설득할 수 있게 된다. 개운하다. 닫혔던 한 쪽 눈을 뜬 것처럼, 유쾌하다.
모처럼 이 책을 다시 펼쳤다. 자신이 제기한 민중경제론이 1990년대 초 소련의 몰락과 함께 현실을 잘못 진단한 쓰레기 이론 취급을 당했던 박현채 선생. 그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진다.
/최기우(극작가·최명희문학관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