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5일은 6.25전쟁이 발발한지 57주년째 이었지만 평일처럼 무덤덤하게 지나쳤다. 이런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반세기 전의 6.25전쟁은 자라나는 신세대에게는 남의나라 이야기로나 들릴 것이다. 이러다보면 북한의 6.25 전쟁에대한 억지주장을 신세대들은 여과없이 사실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남한이 북한을 용서해주는것과 그들의 과거 잘못을 망각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과거의 잘못을 용서는 있을수있어도 잊지는 말어야할 것이다. 그래야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은 북한의 김일성 구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모택동 미국의 트루만 대통령 그리고 맥아더 사령관이 핵심 인물이다. 1950년 6월 24일 해리 트루만 미국 대통령은 주말을 고향에서 보냈다. 토요일 밤 9시 잠자리에 들려는 대통령에게 딘 애치슨 국무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다는 보고였다. 트루만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북한군을 저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강력한 결정을 한 것은 불과 10초조도 안됐다고 한다. 트루만 대통령의 생각은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는다면 공산국가를 이웃에 둔 작은나라들은 그들의 협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것이라는 것을 생각했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밝혔다.
미국은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미군을 한국전에 파견했으며 3년간의 전장(戰場)에서 5만명이 죽고 10만명이 부상을 당했다. 북한의 김일성이는 남침을 계획하고 소련의 스탈린을 3번 방문했다는것이 흐루시쵸프의 회고록에 나온다.
스탈린으로부터 남침에 대한 지원약속을 받었으며 중국의 모택동으로부터 사전 승인을 먼저 받으라는 지시도 받었다고 한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 작전으로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중국의 모택동은 45만명의 중공군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이 전쟁에 하바드 대학 병사 20명이 숨졌으며 지금도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하바드 대학 예배당 벽면에 새겨져있다. 자유를 위해 생전 듣지도 못한 이국땅에 목숨을 받쳤다는 구절과 함께. 그러나 정작 우리는 6.25를 잊어만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