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역사를 무서워하라

'한국사 신론' 이기백 지음...민중의 힘에 의해 발전하는 역사

80년 민중항쟁을 총칼로 다스리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새로운 군사독제 체제를 출범시킨 신 군부는 새 시대라는 구호를 내걸고 민중들의 뜻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사회 질서를 무력의 힘으로 구축하려 한다. 힘에 의해 정권을 잡은 모든 세력들이 그러하듯 그러한 힘의 논리는 당연하게도 강력한 민중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이러한 민중들의 정치적 참여는 더욱 구체적이고 계획적이며 그 범위가 확산되어갈 수밖에 없는 게 역사의 흐름 아니던가. 바야흐로 민중들의 정치세력화가 사회변혁의 의지로 확산일로에 들어선 게 80년대였다. 그 의지의 하나가 사회과학 서적의 출판이었다. 그 때의 출판 일은 민중운동의 일환이었고 지식인들의 은밀하고도 확실한 지원을 받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신군부는 정권을 잡자마자 사회에 영향? ?있는 출판물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게 되는데 그 때 정리(?)된 출판물이 바로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뿌리 깊은 나무> 였다. 음란 퇴폐 간행물을 정리한다며 그 잡지들을 싸잡아 폐간 시켜버린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문학에 대한 책들보다 해방전후에 대한 역사책들을 찾아 읽고 있었는데 어느 날 뉴ㅡ스 시간 말미에 희한하게도 이기백 선생의 <한국사 신론> 이라는 역사책을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이것들이 이제 희한한 일까지 선전을 다 하네, 또 좋은 선생 한분 망가지겠군' 하면서도 궁금해서 그 책을 사서 읽었다. <한국사 신론> 은 통사인데 나는 그 때 한우근의 <한국 통사> 를 읽으며 매우 감동을 받으면서도 뭔가 찜찜한 구석을 떨칠 수 없음을, 이 책을 읽음으로 해서 역사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역사는 민중들의 힘에 의해 발전하고, 역사는 준엄하고, 역사에는 용서가 없으며, 역사를 모르면 문학이고 뭣이고 간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얻었다. 나는 이 책을 세 ! 번쯤 읽었는데 이 책을 통해 역사의 향기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는 사람들의 모여 살아온, 살고 있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살아 왔으며 살고 있고 살아 갈 것임을 믿는다. 역사가 민중들의 진정한 힘에 의해 발전하며 역사가 우리 곁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우리가 지금 새로운 역사적인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이 책은 준엄하게 일러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한 시대적인 사명을 다 한 죽은 망령들과 힘들게 싸우고 있다. 우리들이 살고 살아가야 할 시대정신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우리 민중들의 몫이고 새로운 선택이 되어야 한다. 철지난 개발독제 귀신들을 몰아내자. 역사를 새로 쓰고 새로 읽으라. 역사를 무서워하라. 역사를 아는 이는 맑은 물에 갓끈을 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