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명성황후

얼마전에 일본인이지만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사죄하며 수치스러운 과거를 알리기 위해 애쓰는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 의 회원 13명이 한국을 찾았다.

 

이들은 “역사를 있는 사실 그대로 후손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은 잘못된 일” 이라며 일본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명성황후는 누구인가. 조선말기 고종의 왕비 즉 민비( 閔妃 )의 별칭 ( 別稱 )이 명성황후이다. 지금에 와서는 영화나 오페라의 주제인물이 되기도 한다. 특히 조선말기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에 대원군과 그녀와의 알력과 대결은 어쩌면 조선 멸망의 촉진제였는지도 모른다.

 

대원군이 계속 집권했더라면 내치( 內治 )를 강화한 뒤 서구열강들에 대한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화의 길로 갔었을 것이다. 대원군은 최소한도 국가 통치에 대한 확고한 개념만은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에 반해 명성황후는 그런 안목을 가질 만큼 학식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역사를 향해 가정법을 동원해 많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럴때 역사에 대한 흥미가 더 생기는 법이다. 민비는 여흥( 餘興 )민씨, 민치록의 외동딸 이었다. 그녀에게는 1남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다 죽고 혼자 남아 고단한 유년기를 보냈다. 주위에 친척이 별로 없다는 장점 때문에 대원군의 눈에 들어 1866년 그녀 나이 16세에 한살 연하인 고종의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궁인 이씨와의 사이에서 완화군( 完和君 )을 얻자 민비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느낀다. 이런 위기를 모면코자 민비는 고종의 총애를 얻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했고, 대원군 반대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그의 친척인 민승호, 민규호를 요직에 등용했으며 대원군 몰락때 까지 30여명 친척을 등용했다. 대원군과의 오랜 세월 권력다툼으로 국력을 낭비시켰다. 결국 그녀는 1895년 8월에 일본 군대와 낭인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슬프고도 수치스러운 역사장면이었다. 명성황후의 묘는 지금 경기도 남양주시 홍릉에 있다.

 

일본군 위안부 규탄 결의안이 미국 하원을 통과한 시점에서 일본인들의 역사왜곡과 잔인성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 조선 말기 명성황후 행태에 대한 정확한 연구의 필요성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