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패지(牌旨)

노비, 상전 대신하여 상거래도

조선시대의 고문서들을 살펴보면서 우선 놀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노비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였지만, 현종 4년(1663)에 작성된 서울 북부 호적에 따르면 오늘날 연희동 일대에 해당하는 이 지역 인구의 3/4 이상이 노비들이었다. 노비 호주만 따져도 절반이 넘었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일단 노비의 신분으로 태어나면 평생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사람으로 대접받는 대신 재물처럼 매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이 비인간적인 제도가 자그마치 5백년이나 지속되었던 왕조가 조선이었다. 노비가 없었다면 양반은 양반으로서의 행세를 전혀 할 수 없었다. 일례로 한옥을 살펴보더라도 그 구조 자체가 노비가 없으면 관리가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노비의 존재야말로 신분제 유지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노비에 대한 양반들의 소유관념은 그만큼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을 가서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 해골이 되었음직한 노비들까지 자신의 호적에 악착같이 집어넣었던 것이 당시의 양반들이었다.

 

그처럼 인간이 아니라 재물로서 취급받았던 노비들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서 분명 비참한 삶을 살았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노비들의 실제 삶을 들여다 보면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노비들 가운데에는 상전인 양반과 떨어져 독립된 가옥에서 살아가는 외거노비들이 있었다. 이들은 호적에 호주로 등재되어 있다. 비록 상전을 받드는 고단한 신세이기는 하지만 대개는 같은 노비의 처지인 처자식들과 한 지붕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잘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상행위에 직접 나서기를 꺼려하였던 상전들을 대신하여 노비들은 상행위에 참여하였다. 예컨대 오늘날 전하는 매매문서 가운데에는 매매의 거래 주체가 노비들인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모두 자신의 상전들을 대신하여 집과 논밭을 팔았던 것이다. 상전을 대신하여 거래에 나선 노비들은 으레 위임장을 지니고 있었다. 예컨대 위의 그림에 보이는 문서는 상전 이아무개가 자기 소유의 노 선남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신안면에 있는 자기 논 5마지기를 시가로 팔라면서 써 준 위임장이다. 이를 패자(牌子)라고 하였다.

 

상전과 노비의 관계는 단순히 인간과 재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실례를 하나 더 찾아 보자. 조선시대 남원의 지리지인 용성지 효자조와 열녀조에는 이례적으로 두 명의 사노(私奴)와 세 명의 사비(私婢)에 대한 사적이 실려 있다. 효자 열녀는 노비의 신분을 따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중 사노 해일은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섬겨 향약(鄕約)의 행사에 초청을 받아 술을 상으로 받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상전이 중병에 걸린 채로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자 그를 대신하여 매를 맞을 것을 눈물로 간청하여 끝내는 장독(杖毒)에 걸려 죽고 말았다고 한다.

 

/유호석(전북대박물관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