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찢어진 종잇조각을 붙여보거라. 그러면 네가 누구이고, 네가 언제 왔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고아소년 토비 터커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 책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 문제와 '다른 나라, 다른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하는 아이다운 상상력을 역사기행과 매끄럽게 연결시켰다. '이집트에서 미라 만들기' 등 고대 이집트를 비롯해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영국 튜더 왕조 등의 역사와 문화가 시리즈로 이어진다.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이집트 관련 상식을 챙기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의지력과 책임감의 중요성에 대해 토론해 보면 더 좋을 책이다.
양부모 집에 온 첫날, 토비는 작은 나무상자 속에서 위와 같은 글이 적힌 사진틀을 발견한다. 종잇조각을 맞춰보던 그는 치마를 입은 고대 이집트 소년 세티로 변신, 파라오 람세스 2세가 다스린 지 60년이 되던 해로 날아가 전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다.
가업을 이어받아 농부가 돼야 하는 세티. 그러나 미라 만들기에 더 관심이 있다. 사촌 네브는 미라 만드는 일을 해야 할 처지이지만 농사일을 배우고 싶어한다. 두 소년은 사이가 좋지 않은 양가 아버지의 눈을 피해 서로의 일을 가르쳐 주기로 한다. 네브의 입을 통해 그려지는 미라 만드는 과정은 어른들도 눈을 떼기 힘들다. 두 소년은 쥐의 시체로 간단한 미라를 만들어 보기로 한다.
네브는 내장을 다 꺼내고 시체 안팎을 깨끗이 씻은 뒤 몸 안의 물을 모조리 빼내고 수 주일간 말리는 과정에 대해 설명해 준다. 비위 약한 세티의 마음이 흔들린다. 그러나 마음을 다져먹는다. "만약 모두가 그런 이유로 미라 만드는 일을 포기했다면, 아무도 미라를 만들지 못했겠지. 그래, 그 사람들이 이겨 냈다면 나라고 못하라는 법이 없는 거잖아."
△내가 늑대였을 때 / 필립 레셰르메이에 글 / 달리 /9000원.
동물적 인간이 사회적 인간으로 탈바꿈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프랑스 그림책. 이 작품은 규율과 조직에서 탈피, 자유인간으로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구와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사회 권위의 힘을 예리하게 풍자한다. '나는 이제 늑대가 아니에요. 여러분과 같은 학교에 가고, 책가방을 메고 다니고, 내 책상에서 공부도 해요. 하지만 어떤 날이면, 달빛이 붉은 밤이나, 목이 쉬거나 머리가 멍한 밤이면, 나는 창가에 앉아 내가 늑대였던 때를 떠올린답니다.' 짧은 동화의 본문 속에는 내 속에 존재하는 동물적 본성이 문뜩 문뜩 되살아남을 말하며 이제는 더 이상 늑대가 아님을 강조하는 역설적 표현이 여운을 남긴다.
찬찬히 곱씹어 볼수록 철학적이고 심오한 내용을 작가와 화가는 늑대와 마을 사람들이란 관계를 통해 재미있고 재치 있게 표현하고 있다.
△ 보이지 않는 적 / 아베 나츠마루 / 창비 / 9800원
한적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부대끼는 아이들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고 있다. 몸집도 크고 거칠 것이 없는 학교짱 아키라와 전학생이라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지만 똑똑하고 당찬 가츠미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소심한 초등학교 6학년 켄지가 주인공이다. 4월 말 켄지는 그해 첫 사슴벌레를 잡지만 이를 이웃마을 아이들에게 빼앗긴다. 그해 첫 사슴벌레를 잡은 것을 마치 훈장타는 것처럼 여기는 아키라와 아이들은 흥분해 이웃마을 아이들과 결투를 벌이게 된다. 소심한 켄지는 결투가 싫지만 끝내 아키라를 거스를 수 없어 결투에 나갔다가 얼떨결에 포로를 잡고 묘한 승리감과 더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우울함에 빠진다.
소설은 낚시와 곤충채집, 비밀기지 만들기 등 여름방학 동안 아이들이 벌이는 여러 놀이 속에서 남자 아이들 간의 편가르기와 경쟁의식, 힘겨루기를 사실감 있게 그렸다. 동시에 그 속에서 부대끼는 켄지의 심리를 담담하지만 섬세한 문체로 묘사한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보이지 않는 적'은 어쩌면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춘기 소년들의 보이지 않는 내부의 자아일지도 모르겠다. 강과 낚시를 배경으로 소년들의 우정을 그린 '울지 못하는 물고기들'로 일본 어린이 문학계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작가의 첫 국내 소개작이다.
△ 우리는 바다로 / 나스 마사모토 글 / 보림 / 9000원
주인공들은 감히 배를 만들겠다고 나선 초등학교 6학년생들이다. 중학교 입시를 앞두고 같은 입시학원에 다니는 사토시, 구니토시, 마사아키, 이사무 등이 여름방학 전에 도시 근교 매립지에서 발견한 목재로 배만들기에 돌입한다. 여름방학이 오면 그 배를 타고 멀리 떠나겠다는 희망을 안고서 말이다. 처음엔 공상처럼, 장난처럼 여기던 배만들기는 점차 아이들이 완수해야 할 과업으로 변해간다. 배는 현재 이들을 옭아매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을 벗어나는 유일한 통로이며 탈출구이다. 개성 넘치는 인물 설정과 생생한 심리묘사가 인상적이다. 이미 27년 전 발표된 소설이지만 소설 속에 묘사된 살풍경한 학원에서의 일상, 집과 학교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아이들의 참혹한 현실은 오늘날 한국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