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에게 띄우는 엽서한장] 수첩 꺼내 네 모습 그리다 아무도 몰래 덮어 버린다

배환봉(시인)

세상 모든 것이 퇴화해도 우리들의 아름다운 시절은 아침 햇살에 피어나는 들꽃으로 다시 피어나기를 고대했건만 어느 결에 시들었을까. 그리움도 오래 되면 바랜다는 걸 모르고 먼 훗날 다시 찾으려고 했다. 한데 이젠 그리워하기에도 너무 늦어버렸다.

 

처음 너를 본 것은 우리 외가에서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일부러 내 외사촌을 사귀어 우연한 만남처럼 다가 왔다고 했다. 어느 여름 내가 산에서 산나리 한 송이를 꺾어다 몰래 네 책상 위 화병에 꽂아 놓았더니 넌 몹시 화를 냈지. 꽃을 한 송이 주는 것은 거절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며 토라졌었지. 사실은 그게 아니고 난 너만을 좋아하겠노라는 의미였는데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해도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넌 갈등으로 헤매었었지. 결국 어른들의 반대로 우린 헤어졌지만 지금까지 나는 네게 이 말을 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백발이 되고 얼마 후엔 이대로 영원한 나라로 떠나야 하는데 참말 어찌된 일인지 우연히 타지에 갔다가 고향 사람들에게서 네 연락처를 알게 되었다. 어쩌면 한 번은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설레었지만 어쩌면 이대로 지상에서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요즈음 들어 나는 가끔씩 수첩에의 네 핸드폰 번호를 보며 아직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는 네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보다가 아무도 모르게 덮는 버릇이 생겼다.

 

/배환봉(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