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돈의 위력은 전통기 왕조시대라고 다를 것이 없다. 오늘날 남아있는 고문서 가운데 상당수가 토지매매문서라는 점도 그런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급자족의 농업경제사회에서 토지야말로 바로 돈이 아니던가. 그러니 토지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집착은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백면서생의 양반이건 또는 평민이건 노비이건 토지에 대한 관심은 한결같았다. 자신들의 모든 경제행위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겼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남남 간에는 물론이거니와 가까운 친척이나 심지어 부부간, 부모 자식 간에도 거래 행위가 있을 경우 이를 문서로 남겼다. 이 매매문서를 명문(明文)이라고 불렀는데 이 낱장의 문서에는 당시 사람들의 경제관념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오늘은 이 매매문서 가운데 특별히 환퇴문서로 불리우는 문서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림에 보이는 문서는 1840년(헌종 6)에 임석현이 정진오에게 논 8마지기를 60냥에 팔면서 작성한 것이다. 당시 임석현은 문서를 자필로 작성은 하였지만 상중이었기 때문에 수결, 즉 서명은 하지 않았다. 사채가 많았던 그는 빚을 갚기 위하여 하는 수 없이 논을 팔았으나 언젠가는 이 논을 반드시 되사겠다는 생각에서 ‘환퇴(還退)’라는 문구를 문서에 삽입하였다. 즉 다시 되사는 조건으로 매매를 한 것이다. 이런 문서를 환퇴문서라고 하였는데 그만큼 토지 또는 가옥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집념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환퇴거래에서 토지를 파는 사람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판매가격과 같은 금액을 지불하고 되살 수 있는 권리를 가졌던 반면, 토지를 사는 사람은 완전한 소유권을 이전받지 못하였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불평등한 거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일시적인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토지를 팔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든 제도적 장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급하게 토지를 내놓은 만큼 시가보다 값이 쌀 수밖에 없었고, 환퇴가격을 시가 기준으로 하기도 하였던 만큼 반드시 매입자에게 불리하였다고만은 할 수 없다. 한편 환퇴의 기간은 거래마다 일정하지 않았지만 대개의 경우 1년을 기한으로 하였으나 특별히 기한을 한정하지 않는 거래도 있었다. 그리고 이 기한이 지나도록 되사지 않으면 그 토지는 영구히 매입자의 소유가 되었다. 필자가 본 문서 가운데에는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논 5마지기를 팔고나서 무려 20년 만에 이를 되산 경우도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절치부심하면서 고초를 겪었을 그 누군가를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찡해진다. 환퇴거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매입자가 되팔기를 거부하거나 아예 그 토지를 제3자에게 넘겨버린 경우이다. 그동안 땅값이 엄청 올랐거나 아니면 급히 돈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하여 열심히 돈을 모았던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만 셈이다. 이 경우 두 사람의 분쟁은 결국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유호석(전북대박물관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