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눈길...이청준 문학전집5' - 류보선 교수

이청준 지음·열림원, 2000.

일찍이 시인 고은은 자신의 자전소설인 ‘나, 고은’에서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한국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말하며 “고향! 그것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다 돌아오게 할 힘이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 고향은 아무런 힘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곳에 마냥 그대로 있기만 하는 고향이 무슨 힘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고향은 현실세계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을지는 모를지라도 때로 측량하기 힘든 위대한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귀향이다”라는 노발리스의 말을 빌자면 고향은 계산속에 찌든 영혼을 정화시킨다. 그러니까 고향은 한 개인을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로 만드는 것인데, 그것은 이청준의 ‘눈길’을 보아도 단번에 알 수 있다.

 

‘눈길’은 몇년 전 ‘이청준 문학전집’을 간행하면서 이청준의 소설 중 ‘고향 풍경’, 혹은 ‘귀향 풍경’을 다룬 소설만을 한 자리에 모은 소설집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작가 이청준은 “내 삶과 문학에 대한 은혜를 따지자면야 그 삶을 주고 길러준 고향과 그 고향의 얼굴이라 할 ‘어머니’를 앞설 자리가 없”다고 스스로 밝힌 적이 있거니와, 그 정도로 고향을 자신의 소중한 문학적 원천으로 여기는 작가가 바로 이청준이다. 그런데 ‘눈길’에는 ‘고향’이 키운 작가 이청준이 고향에 대해 느낀 절망과 분노, 그리고 회한과 황홀경의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눈길’에는 지금, 이 시대의 위대한 작가 이청준의 정신적인 성숙 과정이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는 셈이다.

 

물론 ‘눈길’의 모든 작품이 ‘고향’을 예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애초에 작가에게 고향은 ?살아 있는 늪?마냥 젊은 패기와 활력을 가두는 감옥, 또는 늪이기도 하고, ‘새가 운들’ 모양 무언가 항상 죄를 지으며 살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원죄의식과 부끄러움’의 터전으로 비쳐진다. 뿐만 아니라 ‘귀향연습’에서 볼 수 있듯 ‘연습’을 해서 돌아갈 정도로, 그러니까 ‘금의환향’ 해야만 돌아갈 수 있는 세속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작가 이청준에게 고향이 자신의 본래성을 귀환시키는 존재이해의 빛으로 다가온다. 다름아닌 ‘눈길’을 기억하고 추억하면서부터이다. 다시말해 한없이 아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눈길’, 그리고 어머니와 자신의 발자국만 있는 신새벽 신작로의 ‘눈길’을 떠올리면서부터이다. 바로 이 두 ‘눈길’과 조우하면서 이청준의 소설은 비로소 고향을 비본래성에 감춰져 있던 존재를 현현시키는 공간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그러니까 ‘고향’을 세속 사회를 비추는 영원한 타자, 혹은 거울로 받아들이면서부터, 이청준의 소설은 매순간 더욱 깊어지고 넓어졌으며, 드디어 한국문학의 위대한 봉우리로 우뚝 솟았다. 위대한 고향의 힘이자 고향의 위대한 힘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큰 명절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는 이즈음이다.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지옥 같은 여정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귀향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아마도 잠시동안이나마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일 게다. 비록 고향이란 곳이 물질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는 못해도 그곳은 언제 항상 우리가 얼마나 유년의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매번 귀향한다. 돌아가서 영혼을 정화하여 전보다는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채비를 하기 위해. 문득, 이 큰 명절에도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내가 가여워진다.

 

사족 하나. 고향을 영혼의 거울 삼아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위대한 작가 이청준 선생이 현재 거친 육체적 질병과 투쟁중이라는 전언이다. 쾌차를 빈다. 그리고 더욱 더 자주 ‘귀향’ 하셔서 더 기념비적 작품을 남기시기를!

 

/본지 서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