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목민심서에서 조선 후기에 무과시험이 극도로 부패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다섯가지를 지적하여 이를 5난(亂)으로 부르고 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만과(萬科)도 그 중 하나이다. 만과는 글자 그대로 만명이나 되는 많은 급제자를 뽑았던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무과에만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그림에 보이는 무과 합격증서 즉 무과 홍패의 주인공 정시룡은 숙종 2년(1676)의 무과에 응시하여 병과 10,305인의 성적으로 급제하였는데, 이 때 선발된 인원은 자그마치 18,251명이나 되었다. 병진만과(丙辰萬科)로 불리는 이 시험은 조선조에서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한 과거였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선발하다 보니 그 시험이 제대로 실시될 리가 만무하였다.
무과시험과목에는 원래 10기(技) 1강(講), 즉 10 종목의 무기(武技)와 강서(講書)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항상 다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관료의 수급과는 관계없이 경축행사의 하나로서, 혹은 민심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실시되었던 임시과거에서는 한 두 가지 과목으로만 시험을 치뤘다. 심한 경우 화살 열 발을 쏴서 한 번이라도 맞히면 급제하였다. 위 숙종대의 과거가 바로 그러한 시험이었다. 심지어 정부에서 그 명단조차 제대로 파악하려 하지 않을 정도였다. 따라서 그 무과급제자들이 벼슬의 기회를 얻는 일은 극히 어려웠다. 다행히도 정시룡은 중군(中軍)을 거쳐 전선대장(戰船代將)으로 승진하였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벼슬길이 막힌 채로 헛되이 늙어갈 뿐이었다.
다산이 말한 5난 가운데 공로(空老)는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들의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서울 권세가의 자제들은 설령 만과 출신자라 하더라도 즉각 임용되어 하루가 멀다하고 승진의 길을 밟아서 10년이 못가서 한 도의 병사(兵使)나 수사(水使)로 출세하였지만, 시골 출신은 벼슬조차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돈없고 빽없는 설움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서울 출신의 이같은 과거 독점은 무과는 물론 문과에서도 광범하게 일어났다. 특히 지방에서 1차시험을 치루지 않고 서울에서 갑작스럽게 열리는 임시과거에서 그런 현상이 더 심하였다. 그런데 무과는 문과와는 달리 정규적인 식년시에서조차 서울 출신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였다. 다산은 그 이유를 격축(擊逐)에서 찾고 있다.
무과시험은 그 특성상 서북지방의 굳세고 날랜 무사들과 영호남의 기재(奇才)들이 좋은 점수를 얻기 마련이었으며, 반대로 서울의 권세있는 장수 집안의 자제들은 호의호식하며 귀하게 자라난 약체들이어서 이들 지방출신과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들 세가의 자제들은 폭력배를 동원하여 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응시자들을 호젓한 골목이나 주가(酒家)에서 싸움을 걸어 때려 눕혀 관절을 부수고 병신으로 만들어버렸다.
모처럼 서울까지 올라왔다가 결국은 시험도 못보고 불구의 몸이 되어 돌아가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런 낭패가 또 어디 있겠는가. 5난의 또다른 하나인 격축은 이렇게 폭력으로 지방응시자들을 쳐몰아낸다는 뜻이었으니, 조선 후기의 과거 운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유호석 전북대박물관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