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말의 대문장가 최치원(崔致遠)이 요즈음 말하는 한류(韓流)의 원조이다. 중국 장쑤 (江蘇)성 양저우(陽州)에 신라의 대학자이자 최고 문장가였던 최치원의 기념관이 설립되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바람이 불고 있다고 한다.
또 최치원과 여인 혼령이 나눴다는 애틋한 사랑의 설화 “쌍녀묘 이야기”의 쌍녀분이 중국에 실제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 최치원은 이무덤속 두여성 혼령과 하룻밤 사랑을 나눈뒤 “쌍녀분기”를 지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중국 대학생들의 한국어 배우기 붐과 한국체험, 한국 기업인을 위한 문화행사가 다채롭게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현지 언론들은 이를 두고 추이펑(崔風)이라고 부른다. 최치원은 중국 당나라에 유학한지 7년만에 18세의 나이로 당나라 과거시험인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그후 낙양(洛陽)에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 그의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치게 된 것은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종사관이 되어 토황소격(討黃巢檄)이라는 격문을 지었는데 이것이 명문장이었다.
29세에 귀국해서는 한림학사로 임명되어 국내에서도 문명(文名)을 날렸다. 최치원은 귀국한후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고 하였으나 진골귀족 중심의 독점적 신분체제의 한계성을 깨닫고 또 국정문란을 목격하고는 정치에 실망하여 외직(外職)을 자청했다. 그당시 대산군(大山郡), 지금으로는 우리 전북 태인의 태수(太守로도 부임한적이 있었다. 태인에 있는 무성서원은 최치원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이 무성서원은 조선 성종15년에 태산사(泰山祠)란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숙종때 무성서원으로 이름이 바뀌어졌던 것이다. 최치원은 경주에서 태어났다고 하나 일설(一說)에는 군산 앞바다 선유도에서 탄생했다고도 한다. 그는 가야산 합천 헤인사에서 운명했다.
정치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경귀중에 이런 것이 있다. “물은 배를 띄울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수도 있다.”최치원이 만든 경귀이다. 백성들의 의사를 존중해야한다는 뜻으로 많이 인용되었다. 또다른 한류가 중국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