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하체 - 수령이 향청에 지시 내릴 때 사용

계사년에 옥구현감이 향중에 내린 하체. (desk@jjan.kr)

요즘처럼 사람을 잘 뽑는 것에 대해 혼돈스러운 적이 없는 것 같다. 달아올라야 할 대선정국은 가라앉고, 덕분에 타들어가는 것은 후보들의 가슴속일 것이다. 사람을 뽑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여전히 어려운 것은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하는 자 못지않게 선택 당하려는 사람들 역시 모든 힘을 다해 뛰기 마련이다. 재래시장이나 복지시설 등에 정치인들의 발길이 늘어나는 것을 보고 ‘선거철’이 다가왔음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경쟁해야 할 상대가 있을 경우 그 싸움은 매우 적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의 뛰어남을 드러내기보다 경쟁자를 끌어 내리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사실은 ‘선의의 경쟁’을 입발림처럼 떠든 그들의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다.

 

향청의 우두머리를 결정하는 일로 머리가 아픈 전라도 옥구현감은 향청에 하체(下帖)를 보내어, 2명을 모두 향장(鄕長)에 임명한다고 지시하였다. 하체(下帖)란 원래 관아에서 일꾼이나 상인들에게 금전이나 물품을 줄 때 작성해 주었던 문서를 말하나 수령이 향약 집강(執綱) 혹은 향교 재임(齋任) 등에게 훈유하거나 지시를 내릴 때도 사용되었다.

 

전씨와 김씨 두명을 향장에 임명하게 된 배경에는 향장을 둘러싼 고민과 대립 때문이었다. 계사년 2월 옥구현의 유향(儒鄕)들은 수령에 품목을 올려 옥구현의 향청에서는 관례적으로 나이 많은 사람 중 이력이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향장으로 임명되었는데, 올해 공교롭게 전씨와 김씨가 동갑이므로, 이력이 있는 전씨를 향장으로 추대하고, 생일이 빠른 김씨를 내년의 향장으로 추대하기로 하였음을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옥구현에 거주하던 김윤숙은 전씨들의 저지로 자신의 부친이 올해 향장이 되지 못하였다고 호소하였고, 옥구현감의 하체를 보면 전씨를 향장으로 임명한다는 위조 문서가 나돌고 있었다.

 

향장의 임명을 둘러싸고 고을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옥구현감은 2명을 모두 향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고을에 나돌고 있던 위조 고목(告目)을 모두 환수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향장은 향청의 우두머리로 수령을 보좌하기도 하고 지방의 풍속을 단속하고 향리들을 규찰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향장은 지역의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추대를 받았고, 수령이 임명하던 자리였던 것이다. 옥구향청의 우두머리를 둘러싼 이 소동은 선후를 정하여 하기로 했기 때문에 전씨와 김씨의 자손심의 문제로부터 발단된 것으로 여겨진다. 생일이 빠르지만 이력이 없었던 김씨와 생일이 늦지만 이력이 있던 전씨 사이에 먼저 향장을 하고자 하는 욕심이 괴문서의 유포로 나타났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소장이 접수되기도 한 것이다.

 

선거철, 한 번 속지 두 번 속지 않는다 다짐하지만 여전히 속을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투표한다. 맘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그중 나은 사람을 뽑는 것, 어쩌면 그것이 표를 가진 사람의 숙명일런지도 모른다.

 

/홍성덕 (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