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전주 한옥마을은 천덕꾸러기였다. 전주시에서 민원이 가장 많이 제기되었던 곳이다. 주민들은 전주시가 1977년 묶었던 ‘한옥보존지구’를 풀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불편한데다 개조하기도 힘들어 도심속 슬럼가처럼 외면받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전주의 명소로 등장했다. 외부에서 귀한 손님이 오면 반드시 안내하는 필수코스가 된 것이다. 전주시가 전통문화도시를 지향하면서 근대생활 양식이 녹아있는 문화공간으로 거듭난 셈이다. 더우기 조선왕조의 관향(貫鄕)으로서 전주를 상징하는 오목대와 이목대, 경기전, 향교, 풍남문 등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어 더욱 그런 느낌을 갖게 한다.
이곳 풍남동과 교동 일대에는 한옥 660여 채가 산재한다. 양옥이나 무늬만 한옥인 집들도 없지 않으나 팔작지붕에 휘영청 늘어선 용마루가 포근하기 이를데 없다.
이 한옥마을은 일본인들의 침입과 무관치 않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대거 전주에 들어오게 되는데 처음 거주한 곳은 서문 밖이었다. 지금의 다가동 근처 전주천변이다. 당시 전주부성 안에는 전라감영을 중심으로 관찰사를 비롯 고급관리들과 향리 300여호가 있었다. 서문 밖은 주로 천민이나 상인들이 거주했다.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군산항을 통해 가져가기 위해 1907년 전주-군산간 신작로를 개설했다. 이어 1911년까지 남문을 제외하고 모든 성곽을 철거해 버렸다. 그러자 서문 근처에서 행상을 하던 일본인들이 다가동과 중앙동으로 진출했다. 이후 1934년까지 3차에 걸친 시구개정(市區改正·도시개발)으로 전주의 거리가 격자화되고 상권이 형성되었다. 이때 서문 일대에 몰려있던 일본상인들이 전주 최대의 상권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전주 도심을 빼앗긴 한국인들은 1930년을 전후해 교동과 풍남동 일대에 한옥촌을 형성했다. 풍남동에는 일제때 공공기관 관사와 금융기관 사택이 즐비했으며 지금도 일본식 한옥 70여채가 남아 있다.
이러한 유래를 가진 한옥마을이 최근 새롭게 들어서는 대형 문화시설과 상업시설 등으로 원주민들이 떠나고 있다고 한다. ‘살아있는 한옥생활’이라는 컨셉은 퇴색되고 돈벌이 관광문화만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자칫 주민은 없고 장사꾼만 득실거리는‘생명없는 한옥마을’이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