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訟事)가 일어나게 되면, 진실을 가리기 위한 공방이 승소의 전제 조건이 된다. 억울한 사람은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해야 하고, 소송을 당한 사람은 자신의 결백을 드러내야 하는 결국 어느 한쪽은 웃고 우는게 송사이다. 수사권과 재판권이 분리되어 있는 요즘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두 권한 모두 지역을 다스리는 수령에게 있었다. 때문에 송사가 시작되면 수령은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한 자료 제출을 요구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관원을 보내어 직접 조사하기도 하였다. 적간기(摘奸記)는 바로 관원이 현장에 나가 직접 조사하고 보고한 문서를 말한다.
1888년 정월 둔덕방(屯德坊)에 거주하는 오성모(吳成模)는 오룡리(五龍里)에 사는 이행연(李行淵) 형제가 자신의 선산에 묘를 쓰자 남원부에 이행연이 자기 멋대로 남의 선산에 묘를 썼으니 즉시 파내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수령은 일을 상세하게 조사하기 위해 이행연 형제를 데려와서 대질 심문하도록 하라는 처분을 내렸다. 대질신문에도 불구하고 이행연은 자신의 일족인 이섭이 싼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맞고소를 하게 된다. 일이 이처럼 복잡하게 얽히자 남원부 수령은 잠시 기다리라는 처분을 내리게 된다.
관청의 판결이 지지부진하자 오성모는 결국 개인이 무덤을 파내는 것이 위법인줄 알면서 마지막 소송을 한 뒤 1월 16일에 결국 무덤을 파내어 버렸다. 자기 멋대로 쓴 무덤이라 할지라도 자신의 땅에 묻힌 이상 묘를 함부로 파내는 것은 조선시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오성모의 사굴(私掘) 사건으로 전환되었고, 이행연의 투장(偸葬, 남의 땅에 몰래 묘를 쓰는 것)에 대한 처벌은 소멸되어 버리고 오성모의 사굴에 대한 조사로 전환되어 버렸다.
오성모가 사사로이 이행연의 고조부 묘를 파낸 소식을 접한 남원부 수령은 양남극(梁南極)을 적간형리(摘奸刑吏)로 임명하여 오성모가 파낸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위 문서는 양남극이 남원 둔덕방(屯德坊) 대야촌(大也村)의 이기백(李起白) 고조의 묘가 파내어진 곳을 살펴 조사하여 남원부에 보고한 적간기이다. 오성모의 고조부 무덤으로부터 파내어진 이기백 고조부 무덤까지의 거리가 36척 3촌이며 오성모 방조총(傍祖塚)으로부터는 41척 8촌으로 앉았을 때나 섰을 때 모두 보이지 않으며, 무덤 위 사토(莎土)가 좌우로 파헤쳐져 있고 동서의 길이는 8척이며 남북의 폭은 9척 9촌이고, 깊이는 1척 5촌 5푼이며 관은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내용이다.
이 일로 인하여 결국 오성모는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오성모 등이 올린 소송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오성모의 억울함은 이행연 집안의 권세에 밀려 쉬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던 듯하다. 관청의 허가를 기다리지 못하고 함부로 묘를 파낸 범법행위에 대한 적간형리의 조사보고서는 거리와 상태까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적간기는 종종 관련 도형이 함께 작성되기도 하였다.
/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