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마당] 신문보도 생명은 중립ㆍ객관성 - 유명량

유명량(주한대만대표부 공보관)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 대부분은 물가가 너무 비싸다고 푸념을 늘어놓곤 한다. 확실히 서울은 천정부지로 치달아 온 부동산 가격 때문인지 대다수 공산품이나 음식 등 소비자 물가가 아주 비싼 편이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고물가 도시’ 서울에서 비교적 값이 저렴하고 품질이 우수한 제품을 하나 들어보라면 바로 한 달 구독료가 1만 2천원에 불과한 ‘신문’을 꼽고 싶다.

 

매일 새벽 6시에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신문은 어김없이 바로 문 앞에 놓여 있다. 무더운 여름이나 추운 엄동설한에도 문밖에 나갈 필요 없이 손만 뻗으면 신문을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대만의 경우 아파트 주거 시스템의 차이로 인하여 신문 배달원이 직접 문 앞까지 배달할 수 없어 아파트 1층 현관이나 우편함까지만 배달해주기 때문에 1층까지 내려가서 가져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한 번 생각해보자. 문 밖을 나설 땐 잠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손을 본 후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경우에는 신문이 제때에 배달되지 않아서 옷을 갈아입고 1층에 가보면 우편함이 비어 있는 경우도 있다.

 

지난 93년부터 97년까지 필자가 미국 시카고에 거주할 당시, 단독주택에 거주하였는데, 신문 배달원은 매일 신문을 집 앞 정원 잔디에 던져 놓았다. 당시는 미 프로농구(NBA) 시카고 불스의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이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였으며, 전날 밤 TV중계를 본 후 가장 기대되는 것은 다음 날 이에 대한 신문의 논평을 읽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곤혹스러웠던 것은 시카고의 날씨가 일년중 거의 6개월이 겨울 날씨인탓에 아침에 마당에 가서 신문을 가져오기 전에 반드시 두터운 신발과 양말, 외투, 모자와 장갑을 신은 후, 영하 20도의 눈 속에서 보물 찾듯이 신문을 끄집어내 실내에 돌아와서 다시 온 몸에 걸친 옷가지를 다시 벗고 난 후에야 신문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볼 때 한국에서 아침에 아주 편하게 - 그것도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 신문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매일 한국 신문을 보는 진정한 이유는 매일 아침 눈앞까지 신문을 배달해주는 것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신문들이 갖고 있는 풍부하면서도 읽을만한 기사거리, 또 높은 수준의 보도 때문이다. 특히 발행부수에서 선두 그룹인 중앙지(中央紙) 또는 지방지(地方紙), 심지어 영자신문까지도 모두 내용이 아주 알차고 풍부하고, 사건평론에 있어서 광범위하게 학자, 전문가를 초빙하여 문제의 핵심을 심도 있고 상세하게 분석한 후 전문적인 견해를 보도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전 세계의 인쇄 매체들은 모두 인터넷의 영향으로 발행부수가 대폭 감소하였지만, 한국의 언론사들은 그다지 큰 타격은 없는 것같이 보인다.

 

앞서 언급한 구독의 편리함 이외에 신문 보도내용의 수준이 여전히 아주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매일 아침 신문 보기를 기대하는 중요한 이유다.

 

한편, 아시아의 일부 국가들에서는 언론자유가 크게 신장되고 인터넷이 발달하게되면서 언론매체간 악의적인 경쟁이라는 ‘부산물’도 생겨났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적잖은 언론사들이 때로는 사려 깊은 보도나 논평이 결여된 과장되고 선정적인 보도방식으로 일반 독자들의 구미에 영합하고, 심지어는 언론자유를 남용하여 개인의 사생활 문제 등 중요한 내용마저 폭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저급한 내용을 경쟁적으로 보도하고, 또 매체간 출혈경쟁이 지나치다보니 많은 언론사들이 문을 닫는 일도 속출했다. 또, 운 좋게 살아난 언론사들도 발행부수의 급속한 감소뿐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었던 영향력마저 상실한 것을 생각해보면 한국의 신문들에 친숙한 필자 입장에서는 무척 마음이 아프다.

 

한국의 신문 종사자들은 앞에 언급한 것처럼 격조 높은 수준의 신문들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얼마 전 소위 ‘변양균-신정아’「스캔들」에 대한 보도는 필요 이상으로 지면을 많이 할애하고, 내용도 상당 부분이 추측성 위주여서 마치 일반 대중의 구미에 영합하여 보도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 사실이다. 한국 신문의 애독자중 한 사람으로서 매체들이 늘 중립성과 객관성의 양대 가치를 소중히 생각해 ‘경계선’을 넘어서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유명량(주한대만대표부 공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