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만건에 가까운 전라도의 고문서 DB가 구축된 ‘호남기록문화시스템(http://honam.chonbuk.ac.kr)’을 통해서 필자가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을 소개해 보자. 우선 신문에 연재할 적당한 자료를 찾기 위하여 검색항목을 이용한다. 그런데 검색방법도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일반분류검색과 전문분류검색에 지역분류검색까지 세분화되어 있다. 일반인과 전문연구자 모두를 위한 배려인 듯 싶은데, 오늘은 이 방법 대신 홈페이지의 맨 상단에 있는 통합검색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신문연재의 특성상 조선시대 생활사와 관련하여 흥미있는 자료를 찾기 위하여 ‘과부’라는 검색어를 넣어보았다. 그랬더니 무려 361건의 자료가 금새 눈앞에 나타났다. 호적관련 문서를 비롯하여 매매문서와 상속문서, 그리고 간찰(편지)까지 각종 문서가 두루 포함되어 있다. 18세기 이후의 문서가 대부분인 이들 문서 가운데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경상도 예천군 개포면에 사는 과부 송씨의 문서들이었다. 그녀의 호적문서만 무려 8건이나 되었다. 이건 얘깃거리가 되겠다싶어 문서들을 찬찬이 훑어보았다. 1735년부터 1753년까지 거의 20년 동안에 걸쳐 3년마다 작성된 호구단자는 물론 관에서 발급받은 준호구들까지 함께 실려 있었다.
영조시대에 예천의 한 마을에서 과부로서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남아있는 송씨의 문서로는 가장 오래된 1735년의 호구단자를 찾아 보자 수십명은 족히 넘음직한 노비명단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딸린 가족으로는 79세의 늙은 시어머니만 달랑 혼자였다. 자식이 없는 것은 일찍 남편을 떠나 보냈기 때문일까. 그래도 노비가 이렇게 많으니 먹고사는 데는 아무 불편이 없겠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문서의 제일 끝에 노비의 숫자를 남자 종 한 명, 여자 종 두 명으로 적고 있어서 실제 그녀들과 함께 사는 노비는 세 명뿐이었다.
대부분의 노비들은 도망을 갔거나 놓아준 노비들이었다. 도망간 노비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팔지를 않고 놓아주었을까. 까닭이 궁금했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3년 뒤의 호구단자를 보니 식구가 한 명 늘었다. 열세 살 먹은 아들이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탓이다. 조선시대에는 유아사망률이 높은 데다가 군역을 피할 목적으로 어린 자식들을 호적에 올리지 않는 경우가 흔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750년의 호구단자를 보자, 송씨 혼자만 을씨년스럽게 기재되어 있다. 90을 바라보던 시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살아 있으면 이제 스무살이 넘었을 아들도 그녀의 곁을 떠났다. 혹시 전염병이 돈 것일까. 3년 뒤에 작성된 그녀의 준호구에는 데리고 있는 노비마저 3명에서 2명으로 줄어들었다. 갑자기 그녀의 남편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검색창에서 ‘예천군’을 검색어로 넣어보자 32건의 자료가 찾아졌다. 이들 자료 속에서 어렵게 송씨의 남편 김몽룡의 준호구를 찾을 수 있었다. 1726년에 그가 발급받은 준호구에 따르면 그는 송씨보다 12살이나 많았다. 이때 송씨는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시동생과 예의 그 시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유호석(전북대박물관 전문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