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김정수

김정수(전주대교수·극작가)

노령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십년 전 우리나라 중간 나이가 서른 한 살쯤이었다는데 최근에는 서른여섯 살을 넘어섰다는 통계도 있다. 이제 마흔 살은 넘어야 어른 축에 끼는 셈이다. 예전에 비해 노인을 위한 복지가 눈부시게 좋아졌다 하지만, 늘어난 노인들은 여전히 외롭고 쓸쓸하다.

 

언젠가 한 교수님이 ‘나도 이제 늙었나봐. 젊은 선생들이 자기들끼리만 밥 먹으러 가면 슬그머니 서운한 맘이 들어’ 하며 껄껄 웃으신 적이 있었다. 그건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며 웃어넘겼지만, 나이가 들면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세상과, 나 없이도 행복한 사람들에게 막연히 서운함 같은 것이 생기나보다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코맥 멕카시의 소설을 코엔 형제가 영화화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상영되고 있다. 어떤 이는 21세기 최고의 영화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피와 폭력이 지배하는 비정한 세상, 절망에 처한 사람들의 대립구도를 통해 순결한 가치들이 파괴되는 현실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너무 늙어 그저 사건을 관망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보안관을 통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늙은 노인은 사회적 약자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도덕률과 윤리는 이 약자를 마치 강자처럼 포장하여 권위를 부여하고 있지만, 그 포장을 벗기고 나면 사회적 경제적 약자로서 초라한 모습만 남게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사람 깜짝 놀랄 일을 해내는 노인들도 간혹 있지만, 때로 그들의 억척에는 세월을 의식한 역설적 서글픔이 깔려 있다.

 

젊었을 때, 빨리 늙기를 바란 적이 있다. 늙게 되면 모든 고뇌와 번민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며, 글에서만 읽던 달관의 경지가 성큼 다가올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아름답게 늙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젊은 시절 날카로운 눈빛과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타협을 모르던 친구가 어느 날 넉넉하고 후덕한 얼굴로 변모해 있을 때, 그 얼굴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세월의 두께를 본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성폭행과 살인, 방화범 노인을 볼 때, 세월이 늘 우리에게 관조의 미덕만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불길한 진리를 깨닫기도 한다.

 

얼마 전 대통령 취임식 날, 한 전 대통령이 “잘 해주길 바라고, 또 잘할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지원하기도 했었으니까…”라고 말했다 한다. “지난 잃어버린 10년간 국민이 많은 것을 잃었다. 발전의 기회도 상실했고, 과거에 집착했고, 일방적 대북관계로 한반도 긴장만 고조됐다”며 가시 돋힌 말도 던졌다 한다.

 

다른 전 대통령이 “보혁 간 평화적 정권교체 속에 대통령에 취임하신 것을 축하한다”며 “안으로는 중소기업과 서민층을 보살피고 남북관계에서 화해협력을 증진시키면서, 밖으로는 6자회담의 성공에 협력해서 한반도와 세계평화에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한 것과는 큰 대비를 보인다.

 

이 두 노인 전 대통령의 말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늙어 대접 받으려면 말도 곱게 하는 연습을 해두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래저래 곱게 늙어가는 어른 노릇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노인들은 늘어만 가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를 만들 책임을 젊은이들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그 책임은 노인에게도 있다.

 

/김정수(전주대교수·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