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대한제국의 등장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문서의 변화에 있어서도 국왕의 지위가 황제의 지위로 오르면서 공식적인 칭호가 변하였기 때문에, 모든 관련 문서들의 형식을 바꾸어야만 했다. 이런 변화의 시작은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사용하기 2년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갑오개혁으로 인한 관제의 개편과 그에 따른 관직의 명칭변화로 인하여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관직 임명장인 '교지(敎旨)'가 사라지고 '칙명(勅命)'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1894년 7월 반포된 '문관수임식(文官授任式)'과 1895년 3월 칙령 제57호로 제정된 '관등봉급령'에 따라 조선시대의 관제는 새롭게 변하였다. 이에 의하면 대한제국기 공무원들은 품계에 따라서 칙임관, 주임과, 판임관의 세 단계로 나뉘어 속하였으며, 칙임관은 1등에서 4등까지, 주임관은 1등에서 6등가지, 판임관은 1등에서 8등까지 구분하였다. 또한 품계 역시 정1품에서 9품까지 총 11계로 구분되었는데, 모든 품계를 정(正)과 종(從)으로 나누었던 조선시대에 비해 2품까지만 정과 종으로 나누고 나머지는 단품으로 하였다. 이로써 당상, 당하, 참상, 참하로 구분하던 조선시대의 관직 구별은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관리 임용장에서도 나타났다.
위의 문서는 1895년 8월에 종1품 숭정대부 어윤중을 탁지부대신, 칙임관 1등으로 임명하는 칙명이다. 조선시대의 '교지'와는 달리 '칙명(勅命)'이라 하여 황제의 명령임을 밝히었고, 기에 황제의 어압(御押)이 쓰여져 있고, 어새는 '시명지보(施命之寶)'가 아닌 '대군주보(大君主寶)'가 사용되었고, 중국의 연호가 아닌 조선의 개국년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1894년의 '명령반포식'에 의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칙임관은 관직교지에 어압(황제의 서압)을 하고 어새를 찍으며, 주임관은 단지 어새만 찍는 반면 판임관은 추천한 대신의 봉교직첩(奉敎職帖)을 작성하고 스스로 서압(署押) 개인(蓋印)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이는 1895년 5월 '공문식'에 의해 '칙임관 임명은 사령서에 어새를 찍고, 주임관 임명은 그 추천서에 어새를 찍는' 것으로 변하였다.
갑오개혁이 가지는 공문서의 변화요소는 국가의 위상, 즉 대한제국의 등장에 따른 변화 요인(칙명, 대군주보, 개국년호 등)이다. 단지 칙임관, 주임관, 판임관 등의 명칭이 일본에서 사용하였던 것이라는 점은 옥에 티로 남는다 할 수 있다. 당시 신사유람단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갑오개혁에 깊게 관여하였던 결과이었겠지만, 한편으로는 19세기 제국주의 열강 속에서 자주적 개항의 기로에 내몰려있던 당시 조선의 관리들에게 있어 선진 시스템으로 일본의 모습이 다가왔고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하는 기우를 떨쳐버릴 수도 없다. 지향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스템이 필요한 것이지 시스템의 변화를 통해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 이 조그마한 차이를 인지해야 할 때이다.
/홍성덕(전북대박물관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