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부모님 전상서'를 그리며 - 김창선

김창선(우석고 교사)

 

시골이 고향인 나는 대도시에서 자취를 하며 고등학교를 다녔다. 워낙 촌이라 그 당시의 통신 수단은 편지가 전부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 처음으로 부모님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이야 예나 지금이나 다를 리가 없건마는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라 지금의 아이들처럼 부모에게 자상한 정을 받고 크지는 못했기 때문에 애틋하게 보고 싶은 마음은 적었지만 그래도 어찌 부모의 사랑이 그립지 않으랴? 지금처럼 '엄마', '아빠'가 아닌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땐 편지를 썼다. 그러나 편지를 쓰는 궁극적인 목적은 돈을 부쳐 달라는 것이었다. 제목은 "부모님 전 상서". "근계시하 만추지절에 존체 금안 하심을 앙축합니다. 저는 어쩌고 저쩌고…" 그 당시에는 뜻도 제대로 모르고 이렇게 서두를 시작했다. 본론은 "다름이 아니오라…"에서부터이다. 다름이 아니오라 돈이 떨어졌으니 돈을 부쳐달라는 것이다. 천수답 몇 마지기 농사를 지으면서 학비를 보내주시는 부모님은 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자식이 유일한 희망이며 자랑거리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이유도 있겠지만 편지를 통해서 장래에 성공할 것을 다짐하고 꼭 효도할 것을 약속하면서 부모님과의 사랑이 두터워졌다.

 

대학교 2학년에 다니는 딸이 그 때의 나처럼 객지에서 대학을 다닌다. 그러나 딸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닐 때 어버이날 이후로 딸에게서 편지를 받아본 적이 없다. 편지 대신에 핸드폰 문자 메시지로 통한다. "○○아, 학교에 잘 다니니? 소식이 궁금하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답장은 금방 온다. 답으로 온 문자 메시지 글자는 몇 자 안된다. "응, 아빠두?^^*" 이 정도가 전부다. 돈을 부쳐 줄 필요도 없다. 본인에게 은행 카드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필요한 때 아무 때나 마음껏 쓴다. 어렸을 때는 금지옥엽 길렀지만 보고 싶은 마음도 별로 없다. 목소리 듣고 싶으면 언제든지 통화 버튼만 누르면 되니 항상 옆에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중학생 아들이 해외 어학 연수를 위해 한 달 동안이나 떨어져 있었는데도 귀국해서 다시 만날 때 그렇게 감격적이지 않았다. 3~4일에 한 번씩 전화 통화를 했는데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소리가 크게 들려서 떨어져 있었다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세대의 부모들과 앞으로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편지 받아볼 일은 없을 듯하다. 사랑을 전하는 방법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 옛날의 "부모님 전상서"가 그리운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젊은 시절 좋아하던 여학생에게서 오는 편지를 기다리며 가슴 졸이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른다. 그녀에게 편지를 써서 빨간 우체통에 넣는 순간부터 답장을 기다린다. 빨간 가방을 멘 우체부 아저씨는 거의 일정한 시간에 집 앞을 지나간다. 우체부 아저씨를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우체부 아저씨는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북청 물장수'처럼 하얀 봉투를 전해주고 천사처럼 휭 하니 골목으로 사라진다. 우체부 아저씨가 하얀 봉투를 내려놓지 않고 그냥 가 버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러나 또 다시 기다림으로 가슴은 벅차오른다. 편지가 있어 즐거웠고 기다림이 있어 행복했다.

 

오늘날의 연인들은 커플폰으로 사랑을 속삭인다고 한다. 커플폰은 요금도 싸기 때문에 늦은 밤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편지를 통한 구구절절한 마음을 전하는 것> 이 아니라 <핸드폰을 이용해 의사소통을 할 뿐> 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다. 또한 '부모님 전상서'라는 말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김창선(우석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