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철저한 예절교육, 회초리도 들었죠"

최정자 前 전북여성단체협의회장

남편은 사업에 실패하고 전주 집을 팔고 '땅은 안속인다'며 방죽안마을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면서 야간에 동네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땅이 진 동네였어요. 다들 못살아서 좀도리쌀을 한집에 모아주곤 했습니다. 3000평 땅에서 복숭아 배 사과 과수원을 하고, 담배농사 수박농사 무농사 안해본 것 없이 다 해봤지요. 두 아들과 딸도 부모가 일하면 나와서 일하고, 토·일요일에도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큰애는 자전거를 타고 아리랑고개 넘어 화장터 지나서 학교를 다녀야 했지요.

 

남편이 엄하고 무섭게 했어요. 중·고등학교 때도 아이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 꿇고 그랬으니까요. 그렇지만 여름방학 때면 완주 고산이나 진안 죽도 등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가족캠핑을 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이 밥 해먹고 친구같이 대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동네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보면 또 인사하고 10번 보면 10번 인사한다고 칭찬을 받곤 했지요.

 

저는 남편에 비하면 느슨한 편이지만,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회초리를 가지고 오라고 합니다. 가지러 가는 동안, 가지고 오는 동안 아이는 아이대로, 저는 저대로 서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 거죠. 종아리에 피가 날 정도로 때리고 부둥켜안고 운 적도 많습니다.

 

아들 둘다 글씨도 모르는데 여섯살에 학교를 보냈어요. 욕심을 냈죠. 청강생으로 보냈는데 숙제를 무얼 냈는지도 몰라서 애가 오면 앞집에 가서 알아와 저녁밥 먹은 다음 집에서 혼자 가르쳤지요. 큰애를 그렇게 하고 나니까 둘째는 공부하라고 닥달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더군요.

 

막내 때문에 1년동안 속상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당구장에서 살다시피 했거든요. 차마 당구장 안에까지는 못 들어가고 형이 가서 데리고 나오고 그랬는데, 재수해서 대학 들어가고 지금은 회사원으로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어요. 무척 속상해도 너무 다그치지 않고 믿어준 것이 잘한 것 같습니다.

 

지금도 자녀들과 손자녀들이 오면 아버지 어머니에게, 또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절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방석 하나 들이는 것, 신발 잘 놓는 것에서부터 예절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순화되지요.

 

최정자 씨는 47년생으로 79년 전주시 호성동의 방죽안마을 새마을부녀회장을 맡아 방죽가에 콩을 심어서 부녀회원들의 재정에 도움을 주었으며, 염소 새끼를 길러 동네 잘살기 운동을 이끌어나가기도 했다. 농협의 고향을 생각하는 주부들의 모임 회장으로서 전주시여성단체협의회장과 전북여성단체협의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상담사 요리사 전래놀이지도사 등 각종 자격증을 취득했고 가야금, 장구, 민요, 살풀이(고전무용) 등을 취미로 배웠으며, 올해부터 전주 금암노인복지회관에서 태극권을 가르치고 있다. 예절교육에 심취해 있으며 대학에서 아동복지학을 공부하고 있다. 현 전북여성단체협의회 특별사업위원회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