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붓으로 섬세하게 얼굴 모습을 그리고 자유롭고 활달한 붓질로 몸체를 표현한 안집(1703∼?)의 초상. 하지만 이 그림은 완성본이 아니다. 오른쪽 위에 '정본차(正本次, 정본에 쓸 것)'라고 쓴 묵서가 있어 이것 이외에도 더 많은 밑그림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일 인물을 그린 여러 개의 초본(草本)을 비교해 정본을 완성할 초본으로 이 작품을 선택한 것이다.
정본처럼 정교하지만 사실은 초본인 작품들. 국립전주박물관(관장 이원복)이 초상화의 초본과 정본을 모아 '조선시대 초상화 초본'전을 열고 있다. 8월 24일까지 전주박물관 미술실.
초본은 정본을 그리기 전 처음으로 인물을 묘사하는 밑그림을 가리킨다. 기름종이인 유지(油紙)에 먼저 버드나무를 태운 숯으로 인물의 윤곽을 잡은 후 먹선을 올리고, 다시 화면 뒤에서 칠하는 섬세한 과정을 거쳤다. 완벽에 가깝게 제작된 초본을 통해 정식으로 비단에 그 윤곽을 옮겨 정본을 그렸던 것이다. 초본을 그린 후에는 품평에서 합격해야만 정본을 그릴 수 있기 때문에 화가는 초본에도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는 정본 초상화를 이해하기 위해 초상화의 제작과정 속에서 초본의 성격을 조망한 것. 2007년 국립중앙박물관 미술실 테마전시에 출품된 전시품 뿐만 아니라 전주박물관에 보관 중인 '고종 어진' '이상길 초상화' 등이 공개됐다. 전북지역에서 활약한 채용신 작품 '전우 초상'과 '묵재 영정' 등을 함께 전시했으며, '기사경회첩' 중 '이의현 초상화'의 제작과정을 추정해 8단계로 재현했다.
보물 제792호인 조선중기 문신 이상길(1556∼1637)의 초상은 전반적으로 17세기 공신도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지만, 바닥에 채전이 깔려있지 않으며 얼굴과 의습의 필선이 긴장감이 떨어지고 다소 도식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어 생시 진상이 아닌 조금더 후대에 그려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임수륜(1680∼1752) 초상은 인물의 개성을 파악하는 데 주안점을 둔 듯 묘사법이 간략한 화가 임희수가 그린 것으로 임수륜의 모습을 벽 뒤에 숨어서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정본과 초본이 함께 남아있는 '이이장(1708∼1764) 초상화'는 정본과 초본을 나란히 전시해 두 작품의 차이를 직접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전시와 관련, 8월 2일 오후 2시 전주박물관 강당에서는 특별강연이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같은 제목의 전시를 기획했던 이수미 학예연구관이 내려와 '조선시대 초상화 초본의 성격 및 제작과정'을 주제로 강연한다. 이날 가족체험 프로그램 '우리가족 초상화 그리기' 행사도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