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문서, 특히 땅과 관련된 문서를 보면 인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바로 토지의 위치정보이다. 조선시대의 매매문서에 표시된 토지의 위치정보는 '어느 면 무슨 뜰 앞 ○자 답' 정도로 쓰여 있는데, 이것으로는 정확하게 어느 지역인지를 알 수 없다. 당시대 사람들 특히 땅을 파고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상호인지하고 있는 땅이었겠지만,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이 땅의 위치를 추적하기란 하늘에 별따기만큼 어려운 듯하다.
조선시대에는 땅의 위치정보를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토지의 면적을 절대적인 면적 예컨대 몇 ㎡나 몇 평으로 표시하지 않았기에 수확량과 절대면적이 혼용되고 있었기에 토지의 위치는 그 토지가 위치한 인접 토지와의 관계로 표시하였다. 그래서 토지대장에는 면적[長廣], 결복(結卜, 토지면적 단위), 기주(起主, 소유자) 외에 사표(四標)라 해서 동서남북의 경계를 표시했던 것이다. 아울러 토지의 지적도가 만들어지지 않은 것도 이러한 다양한 기준들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측량'이라는 기술이 사용된 것은 1834년 '청구도'로 알려져 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역시 측량에 의해 작성된 지도이다. 우리 나라 전역을 대상으로 근대적 측량에 의해서 토지를 조사한 것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시행된 토지조사사업이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본은 통감부가 설치될 때부터 한국에 대한 토지조사사업을 계획하였다. 1912년 조선부동산등기령, 토지조사령 등을 반포하고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였다. 토지조사사업은 전국의 토지를 근대적인 측량기술에 의해 측량하고 그것을 토대로 지번체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토지소유에 대한 대대적인 전환을 의미하였다. 이 조사와 함께 토지소유에 대한 신고를 병행하여 근본적으로 한국의 토지에 대한 일본의 '접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후 토지를 매매할 때에는 측량된 지적도의 첨부가 의무화되기에 이르렀다. 토지의 측량은 도시개발이나 간척 등의 사업을 시행함에 있어 필수적인 것이었다. 위의 지적도는 불이농장의 소유지역들에 대한 지적도이다. 수계(水系)의 표시까지 되어 있는 이들 지적도는불이농장에 설립된 임익수리조합에서 소유한 농지들로 소작인들에게 농지를 내어주고 소작료를 거두는 등 농장운영의 기본 데이터로서 활용되었다. 대아리저수지로부터 옥구군에 이르는 수로의 건설과 전라북도 각 지역에 흩어진 농장 소유의 토지에 대한 지적도는 근대의 출발에 따른 토지소유의 재편보다는 식민지화의 전초작업으로 진행된 수탈의 의미가 담긴 문서이다.
/홍성덕(전북대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