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죽음을 이해해야 잘 살 수 있다"

톨스톨이 작품선 중 이반 일리치의 죽음…부·명예 향한 현대인들 삶·죽음 진정한 의미 알까

죽음이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이다. 죽음이란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모든 것을 빼앗아갈 뿐만 아니라 바로 우리 자체를 소멸시킨다. 죽음은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는 나, 웃고 떠들고 생각하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조만간 이토록 두려운 무(無)의 심연에 던져져야 한다는 것을 (그것도 너무나 확실하게) 알고 있다. 우리들 각자는 어떻게 해도 자신의 죽음을 남에게 전가할 수 없다. 죽음이 진정 문제인 것은 그것이 '나'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필연적이며 간단한 진리를 그러나 우리는 놀랍게도 거의 까맣게 잊고서 산다. 우리의 삶의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 죽음을 확실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산다는 것에는 메울 수 없는 위장과 허영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다. 판사(判事) 이반 일리치도 마치 죽음이란 남에게만 해당되는 듯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그럴 듯한 집기를 구입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승진에 마음을 졸이면서 바쁜 (혹은 신나는) 삶을 산다. 그는 이런 것이 삶의 모든 것이라는 데에 의심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는 부와 명예를 좇는 현대인의 분주한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그럴 듯한 집기를 구입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며 승진에 마음을 졸이면서 바쁜 삶을 살던 판사 이반 일리치의 삶은 부와 명예를 좇는 현대인의 분주한 일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desk@jjan.kr)

 

그러나 느닷없이 그에게 찾아 온 죽음은 그가 추구해 왔던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하찮으며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인지를 생생하게 폭로한다. (우습게도) 아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커튼을 달다가 사다리에서 떨어진 그 하찮은 사건이 그를 죽음으로 안내했던 것이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비참하게도 일생 동안 자신이 허황된 삶을 추구하여 왔다는 것을 그는 너무 늦게 깨닫는다. 아내를 향한 거의 견딜 수 없는 그의 분노는 "무엇이 삶에서 의미 있는 것인가?"를 보지 못하게 한 세상에 대한 저주이고, 그것에 속아 넘어간 자신에 대한 절망스런 자책(自責)의 몸짓이다.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은 또 왜 그렇게 구질구질한가! 이제 대변까지도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반 일리치에게 산다는 것은 꼴사나운 수치이며 모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절망스런 죽음은 "무엇이 자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인가?"를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 건장하고 충실한 하인 게라심에게서, 노동을 하고 돌아오는 그의 만족스러운 얼굴에서 이반 일리치는 삶의 위안과 평화를 느낀다. 죽음은 어줍게 세상 평판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의 본모습대로 살도록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이런 점에서 죽음은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 우리 각자의 삶을 끊임없이 반성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선물이자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길지 않은 중편 소설은 난해한 철학 개념을 전혀 동원하지 않고도 죽음에 대해 철학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거의 전부를 선취(先取)하고 있다. 여기에는 죽음의 피상적인 더께를 걷어낸 후 우리들 인간이 죽음과 맺을 수밖에 없는 연관성이 온전히 구현되어 있고, 삶과 죽음에 대한 톨스토이의 깊은 통찰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다. 죽음은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좋은가?"를 묻는다. 그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기 때문에 얼굴을 돌린다고 회피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이제 정신없이 우리를 몰아대는 현실에서 한 발 떨어져서 느릿느릿하게 자신의 죽음과 삶에 대해 이반 일리치와 함께 고민할 때이다.

 

/황설중(원광대 인문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