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가에게 있어서 데뷔작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기초과정을 끝내고 공식적인 자리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77년부터 연묵회를 시작으로 전시활동을 해왔지만 산민 이용이 말하는 데뷔작은 시간적인 개념으로 처음 세상 밖으로 나온 작품이 아닌, 작품의 변화과정 안에서 만나게 된 새로운 시도에 데뷔의 의미를 두고 있다.
전통적 방식인 서체 중심의 서예를 하는 상황에서 문자의 회화적인 표현으로 '현대서예'라는 새로움을 선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명칭에서 전통적인 서예와 구별하는 의미의 시대성을 부여 한 '현대서예'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통용되고 있지만 '조형서예'가 더 걸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가 데뷔작으로 꼽는 작품은 1988년 작품 '배속에 든 일천권의 책을'이다. 문자의 상형성을 가져와서 재해석한 것으로 공식적으로 변화의 시작점을 알리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글씨의 비중보다 그림이 더 크게 배치되어 있어서 시각적으로 '문자문인화'와 같은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글씨를 통해 내용을 전달하면서 제목에서처럼 사람 형상이 옆으로 누워있고 그 위로 겹겹이 쌓여 있는 책의 형상은 내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된 시도는 현재의 작품을 완성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새로운 도전으로 회화적인 형상이 나왔다면, 지금은 다시 전통으로 회귀하여 문자 자체의 조형성을 부각시킨 것으로 변화해 있는 것이다. 전통을 고수하면서 서예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에 도전하는 자세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해 보인다.
/구혜경(독립기획자·문화전문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