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窓] 보험들었잖아! - 김재호

김재호(사회부장)

지난 8월 전주지방법원의 한 형사단독사건 법정. 방청석에 열 대여섯 명이 앉아 있는데, 재판 진행에 따라 피고인석을 들락 날락 하는 것이 모두 불구속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이다. 오전 11시 30분. 50대 후반의 부부와 젊은 남자만 남았다. 재판부가 호명하자 젊은 남자가 피고인석으로 가고, 이어 신원 확인절차를 거친 뒤 자리에 앉았다. 그러는 사이 부부는 방청석 앞좌석으로 당겨 앉았다. 부부는 젊은 피고인이 낸 교통사고 피해자의 부모였다.

 

피고인 A씨는 지난 6월 어느날 밤, 전주시 덕진구 전주소방서 앞 대로에서 음주 운전하던 중 횡단보도 부근에서 도로를 건너던 부부의 아들 B씨를 충격했다. 당시 야간 횡단보도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설치된 조명등이 현장 부근을 비추고 있었다. 이날 사고로 B씨는 허리 등을 크게 다쳐 병원으로부터 14주의 치료를 요하는 중상 진단을 받았다.

 

A씨가 운전한 자동차는 책임보험에만 가입돼 있었다. 피해자가 경상일 경우 책임보험으로 웬만한 병원 치료가 가능하지만, 무려 14주의 중상을 당한 피해자측은 불안했다. 책임보험으로 가능한 병원치료비는 2000만원 정도. 그러나 허리를 중심으로 크게 다쳐 간병인 도움으로 대소변을 보고 있는 젊은 피해자 입장에서는 앞으로 병원치료비가 엄청나게 많이 나올 가능성이 큰데다, 향후 예상되는 후유증과 추가적인 치료 등이 더욱 큰 문제였다. 진안이 고향인 부부는 6월 농사철에 입원한 아들 돌보느라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했다. 당연히 그에 상응하는 합리적 수준의 형사합의가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처음 피고인은 500만원의 형사 합의금을 제시했다. 최근 1,000만원까지는 마련해 볼 수 있다 배수진을 쳤다. A씨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몸으로 때우겠다'는 식이었고, '잘못했다, 선처해 달라'는 등 인간적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피해자 B씨의 어머니는 재판부에 호소했다.

 

피고인 A씨가 낮은 수준의 형사합의금을 제시하는 것은 '돈이 없다'는 데서 출발했다. 그는 사고 후 재판부에 신용회복위원회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서류를 증거물로 제출, 재정적 어려움이 크다는 점을 내세웠다. 소액을 형사합의를 하겠다는 의도가 드러난다.

 

A씨는 음주운전으로 중상의 교통사고를 일으켰음에도 불구, 형사합의도 '배째라'식 태도를 보여 피해자측을 분노케 했다.

 

하지만 재판부도 고민이 클 것 같다. 아무리 엄한 판결로 피고인을 처벌해도, 피해자가 수긍할 만한 '적정 수준의 합의'가 전제되지 않아 피해자에게 이익이 없는 결과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이 때문인지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다음 재판일(18일)에는 적절한 합의를 하고 출석하라고 당부했다.

 

도로교통공단의 한 교육담당자는 "교통사고는 절대 일으켜서도 안되고, 당해서도 안되는 일생일대 비극"이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어떤 어려움으로 생활고를 겪고 있는 상태에서 음주 교통사고를 일으켰다. 형사합의가 안될 경우 오랫동안 징역살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피고인의 차량에 치여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중인 젊은 피해자, 그리고 그 가족은 어떤가. 젊은이의 몸은 망가졌고, 향후 예상되는 후유증 공포에 휩싸여 있다. 평화롭던 젊은이, 그리고 농부의 일상이 무너졌다. 그야말로 천형이다.

 

최근 전주지방검찰청은 도민의 생명과 재산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교통사고 감소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검찰은 강한 단속과 엄한 처벌을 강조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에앞서 도민들의 교통사고에 대한 의식 변화가 시급하다. 단 한 번의 교통사고가 개인은 물론 가정을 파탄시킬 수 있는 심각한 범죄행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런 인식이 없은 한 A씨처럼 '돈이 없다'거나 '보험들었잖아!'라는 몰인정한 사회는 계속되고, 교통사고도 줄지 않을 것이다.

 

/김재호(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