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다란 손에는 굳은 살이 가득하다. 평생에 로션 한 번 발라본 적이 없다.
인색하다 싶을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구멍난 속옷도 그냥 버리는 법이 없었다.
입을 수 있을 때까지 기워 입었다.
8일 전주 남문시장 3동. 오늘도 어김없이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할머니가 있다. 장사꾼이 천직이라는 그는 '깨배기 주단' 주복순(78)씨다. 젊은 시절 얼굴에 유난히 주근깨가 많아 얻은 별명이다.
그는 57여년간 같은 장소에서 한복만 팔아왔다. 한복 만드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억척스럽기도 했다. 덕분에 '깨배기'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에겐 자신만의 철저한 장사 원칙이 있다.
일단, 좋은 한복감만을 취급했다. '제 값 주고 제 값으로 팔자' '비싼 건 비싸게 팔아야 한다'는 게 그의 철칙. 여길 찾던 손님들이 다시 이곳을 찾도록 하려면 좋은 물건으로 승부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손님이 물건이 맘에 안 든다며 바꿔달라고 해도 절대 거절하지 않았다. 10번 와서 10번 다 바꿔 달라고 해도, 바꿔줘야 한다고 여겼다.
"어느날 TV에서 미국 유명한 재벌가가 그런 말을 하대요. 다른 회사는 물건 바꿔달라고 하면 안 바꿔줬는데, 자기네 회사는 손님들이 원하면 10번이라도 바꿔줬다구요. 그래서 성공했대요. 못 배운 사람이라, 그 말만 믿고 그대로 했어요."
처음부터 주단집을 운영한 건 아니었다. 해방 후 그는 처녀 시절 한 직물공장에서 경리를 봤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전국 직물공장 사장님들과 안면을 트는 계기가 됐다고. 덕분에 남는 천을 얻어 염색작업을 해 팔 수 있었다. 그때만 해도 물을 들인 섬유가 귀해 불티나게 팔렸다.
색감을 보는 눈이 남달랐던 그는 한복 문양을 골라내는데도 타고난 감각이 있었다.
유행에 민감하지 않으면서, 우아한 결을 낼 수 있는 문양을 꼽기만 하면, '대박'을 내곤 했다.
사람들에게 맞는 색감과 한복 스타일도 한눈에 알아보는 '센스'도 타고났다.
하지만 이런 그에게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3년 위암 선고로 항암제를 23번을 맞아 온 몸의 털이란 털은 다 빠지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모두가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지만, 견뎌내고 제2의 인생으로 재기했다.
"위암을 극복한 후 덤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됐어요. 나만, 내 가족만 잘 살면 되는 줄 알았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 못해 봤어요. 막상 내가 힘들어 보니, 참 잘못 살았구나 싶었죠. 신앙생활도 하게 됐구요. 지금은 모든 범사에 다 감사하고 삽니다."
지금껏 그는 한복 외엔 다른 옷을 입어본 적도 없다. 한복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싶어서다.
어떤 체형도 맵시나게 입을 수 있는 옷이 한복이요, 두꺼운 느낌이 들지 않으면서도 여러겹 겹쳐 따뜻하게 입을 수 있는 옷도 한복이다. 색감은 화려하지만, 단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도 한복의 매력.
며느리, 곧 들어올 손주며느리까지 한복사랑의 대물림을 이어가고 있는 걸 보면, 한복과 그와의 인연은 정말 끈끈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