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들의 환호 속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누볐던 숱한 스포츠 스타들. 하지만 전성기를 넘어서면 어느새 팬들의 기억에서 지워지곤 한다. 그때 그 시절 그들은 어디서 무얼하며 지낼까. 현역에서 물러난 전북 출신 스타들의 삶을 추적한다.
1972년 7월 19일 서울 동대문야구장. 고교 야구가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던 그 시절, 이 곳에선 제26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야구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야구 명문 군산상고는 부산고를 상대로 8회까지 1-4 스코어로 밀리며 벼랑 끝에 서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나락 9회말. 선두타자가 안타를 치면서 한 줄기 희망의 길을 열었고, 후속 타선이 만루까지 만들었다. 이어 밀어내기로 1점을 보탠 후 2점 적시타가 터지며 동점을 만들었다.
이제 9회말 투아웃. 군산상고 김준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경기장을 가득메운 2만2000여 관중은 숨을 죽였고, 김 선수는 3루수와 유격수 사이를 가르는 좌전안타를 멋지게 엮어냈고, 우승기는 군산상고에 돌아갔다.
야구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나 나올 법한 픽션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군산상고 앞엔 언제나 '역전의 명수'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김 선수는 실업팀과 대학을 거쳐 1982년 프로야구 최고 명문 해태 타이거즈 창단 멤버로 참여, '해태 불패'의 신화를 한줄씩 써내려 갔다.
1987년 한국시리즈. 해태 타이거즈는 2년 연속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삼성 라이온즈를 4연승으로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며 시리즈 우승을 하나 더 보탰다. 당시 김 선수는 12타수 6안타로 경이적인 5할 타율에 3차전과 4차전에서 역전 결승 홈럼 2개를 날리며 '한국시리즈 MVP'를 거머쥐었다.
"사실 1987년 당시 개인적으론 너무 힘든 시기였습니다. 장모님은 세상을 떠났고, 아내는 심하게 아파 병원을 드나들었죠. 당시 한국시리즈는 한해 동안 쌓였던 시름을 한방에 날려주었습니다."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 최전성기에 김성한·김봉연과 함께 '황금 트리오'타선을 구축했던 김준환 선수는 지금도 듬직하고 성실한 스포츠맨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
2003년 원광대 야구부 감독직으로 자리를 옮긴 왕년의 김 선수는 야구의 전성기를 다시 만들기 위해 일선에서 뛰고 있다. 김 감독이 취임과 함께 내린 조치는 폭언과 폭력 절대 금지. 스포츠계에 만연한 선후배 사이의 폭력은 인간성을 깡그리 상실시키고, 전력에도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판단에서다. "폭언·폭력 금지 규정을 어긴 선수에겐 가차없이 가혹한 벌을 내렸습니다. 이젠 돈독한 선후배의 정을 바탕으로 야구 전성기의 기초를 하나씩 쌓고 있습니다."
김 감독은 지휘봉을 잡은 후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솔선하는 감독상을 보여주고 있다. "감독을 맡은 직후 그렇게 즐기던 골프를 끊었고, 새벽마다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차고 2시간씩 운동을 합니다." 한때 이븐파 기량을 기록하며 준프로 수준의 경지에 올랐던 김 감독이 골프를 단념한 이유는 야구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다짐과 주변의 궂은 입줄에 오르는게 싫어서다.
원광대 야구부는 김 감독이 사령탑에 오른 후 2005년 대통령기전국대학야구대회 우승을 비롯 준우승 3회, 3위 2회의 성적을 거뒀다.
야구 인생 40년, 50대 중반(1955년생)의 고개를 걷는 중년의 김 감독에게 장래 희망을 물었다. "프로야구 감독을 한번쯤 맡고 싶습니다. 물론 후진 양성이란 주제는 죽은 때까지 풀어나갈 임무이고요." 김 감독에겐 1999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에 임명된 후, 구단이 매각되면서 지휘봉을 내려 놓아야만 했던 아픈 기억이 가슴 깊이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