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만은 지키자-생태보고서] 내장산의 숨은 비경을 찾아서(2)

비자나무 군락 푸르른 향기...천연기념물 굴거리나무 숲...

내장산 입구 전경. (desk@jjan.kr)

제법 가을바람이 소슬하다 싶었더니 그새 진노랑상사화는 지고 말았다. 그나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기간이 짧아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제 나름대로의 살아남는 전략인가 싶다. 우리나라 식물종의 15% 정도인 760여종의 식물이 자생하는 내장산 국립공원에서 진노랑상사화는 비단벌레와 함께 이 지역의 생태계를 대표한다는 깃대종이다.

 

▲ 내장산의 깃대종 진노랑상사화

 

한국특산식물로 내장산, 선운산 등의 일부지역에 분포하며, 그 개체수가 적어 멸종위기야생동.식물 Ⅱ급으로 지정된 진노랑상사화는 먹뱀이골로 이어지는 원적계곡 주변에서 분포한다. 7종의 자생상사화 중 가장 이른 8월초에서 중순에 꽃을 피운다.

 

진노랑상사화군락 특별보호구로 지정된 먹뱀이골을 따라 이조암재를 넘으면 백양꽃 군락지(본보 9.10자)가 분포한다.

 

같은 봉우리 자락인 원적계곡과 이조암 계곡 주변이 습도가 높고 자갈이 많은 수풀에서 잘 자라는 상사화가 자라기에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진노랑상사화는 보호구역 내 300여본, 주변에 600여본이 분포한다. 이전에 비해 최근 개체수가 많이 줄었다.

 

내장산 국립공원 자연보전팀 김진섭 팀장은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강우 빈도가 높아지면서 큰물에 쓸려나가는 일이 잦아지고, 사람들이 캐가거나, 알뿌리를 캐먹는 멧돼지로 인해 서식지가 훼손되고 있다"며 "사람들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탐방로를 우회시켰고 동물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군락지 주변에 400m의 전기 펜스를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노력으로 올해는 멧돼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깃대종 복원사업으로 묘포장에 알뿌리를 이식해 증식을 하고 있으며 올해는 씨앗을 채취해서 서식지 주변에 파종을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원적암의 비자림

 

'내장 산 골짜기 돌벼래 위에 / 불타는 가을단풍 자랑 말아라 / 신선봉 등 너머로 눈 퍼 붓는 날 / 비자림 푸른 숲이 더 좋더구나'

 

원적암 비자림 안내판에 적힌 노산 이은상의 시다. 원적암 계곡의 상록 침엽 비자나무 숲은 최고 수령이 750여 년에 이르고 높이 약 20m, 직경1~2m나 되는 100여 그루의 거목들이 웅장하게 서 있어 마치 동화 속 나라에 온 착각에 들게 한다.

 

내장산 연자봉 아래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굴거리나무. (desk@jjan.kr)

 

천연기념물 153호로 지정된 백양사 비자나무 숲보다 더 북쪽에 위치해 학문적 연구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가을이 되면서 도토리만한 열매는 붉은 자주색으로 익는데 옛날부터 구충제나 기름을 짜서 먹거나 또는 호롱불을 밝히는 둥 쓰였다. 목재는 무늬가 좋고 재질이 뛰어나 예부터 바둑판이나 고급 가구를 만드는 등 쓰임새가 많다.

 

문헌에 의하면 백양사 비자림도 고려 고종 때 각진국사가 기생충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조성했으며, 1970년대까지 주민들에게 열매를 나눠줬다고 한다. 이때 심어진 나무들의 후계목이 천연분포 숲을 이루거나 노거수로 남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이다.

 

하지만 원적암 비자림은 건너편 연자봉 아래 굴거리나무가 군락을 이룬 것으로 볼 때 난대성수종이 살기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자생분포지라 해도 큰 문제는 없을 듯싶다. 따라서 천연기념물로 추가 지정하거나 별도의 보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 300년 넘은 모과나무

 

일주문~백련암~원적암~내장사에 이르는 탐방로는 가장 기분 좋게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비자나무 숲의 독특한 향과 침엽수들이 내뿜는 피톤치드는 피로를 풀어주고 마음을 안정시켜준다. 걸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다.

 

세월에 닳고 닳았나? 300년이 넘었다는 모과나무가 한그루가 곱게 늙은 노인네 피부처럼 반질반질 수피를 달고 대 숲을 배경으로 원적암 아래에 서있다.

 

너무 늙어서인지, 해를 거르는 것인지 열매를 맺지 않는 모과나무는 마치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여유롭고 한가롭다.

 

사랑의 다리에서 불출봉 쪽으로 400~500년생의 늙은 단풍나무 50~60여 주가 내장산의 명성을 지키고자 굴참나무와 서어나무와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어떤 아픔이라도 넉넉하게 감싸 안아줄 것 같은 원숙한 삶의 지혜가 담긴 박완서의 소설의 주인공을 보는 느낌이랄까? 탐방로 주변에는 총 27개의 생태안내판이 숲의 기능과 탐방로 주변의 생태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어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 굴거리나무 군락이 만든 푸른 숲

 

기분 좋은 산책의 여운을 뒤로 한 채 연자봉(675m) 아래에 자라 잡은 천연기념물 91호 굴거리나무 군락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쪽 해안지대와 제주도 등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는 굴거리나무는 이곳이 자생 분포지의 북한계선이다.

 

내륙 깊숙이 위치하고 있고 분포 밀도도 높아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최근 삭도(케이블카) 설치를 두고 환경단체와 지자체 간의 공방이 한창인데 그 논란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내장산 케이블카 설치로 인한 굴거리나무 군락의 훼손이다.

 

이곳에선 야박하게 느껴질 만큼 강화된 국립공원 관리법이 무색하다. 연간 13만 명에 달하는 케이블카 관광객은 함께 3개의 대형매점이 있어 국립공원 봉우리 주변이 유원지 상가처럼 번잡하고 소란스럽다. 과거 대피소 건물이거나 국립공원 이전에 만들어진 시설이어서 강제적인 폐쇄는 어렵겠지만 장기적으로 주변 경관과 생태적 여건을 고려해 철거해야 한다.

 

가을철이면 여전히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관광객이 등산로를 따라 군락지를 관통해 하산하는 것도 문제다. 관찰 데크나 펜스 시설이 이전보다 나아지긴 했지만 등산로의 침식과 담압이 굴거리나무에 뿌리를 노출 시키는 등 건강한 생육을 방해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굴거리나무 군락의 상태가 건강하다는 것이다. 이 지역 모니터링을 담당하고 있는 전북대학교 김철환 교수는 "펜스 설치 등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차단되어 굴거리나무 숲이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보호구역 이외에도 해발 400m 부근에서 굴거리나무가 자연발아해서 잘 자라고 있다"고 말했다.

 

굴거리나무가 졸참나무, 굴참나무, 개서어나무와의 경쟁에서 이겨 서식지를 확대하고 군락을 형성하는 것은 오롯이 자신들의 몫이다. 사람들이 도와줄 일은 단 한 가지, '숲을 그만 내버려 둬'이다.

 

/이정현(NGO객원기자·환경운동연합 정책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