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40줄에 청상과부가 됐지만 순대국밥 하나로 6남매를 어엿한 사회인으로 출가시킨 임실 재래시장의 '도봉집' 박정례씨(68).
임실뿐만 아니라 전주와 남원 등 임실시장의 전통순대'도봉집'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여서 이곳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룬다.
"요즘에야 그렇지만 과거에는 자식들 밥먹이기에도 벅찼다"는 그녀의 고달픈 인생역경이 주름진 얼굴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전에는 혼자서 식당을 운영했으나 자식들이 결혼하고 부터는 두 며느리와 큰 딸이 일을 함께 거들면서 한가해졌다.
홀몸으로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평생을 보냈지만 장성한 자식들의 모습을 볼라 치면 흐믓한 미소가 얼굴에서 떠날줄을 모른다.
박씨가 순대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1983년. 19세의 나이로 결혼은 했지만 늘어나는 자식과 찢어지는 가난에 시달린 그녀는 당시 시장에서 순대국집을 운영중인 시누이에게 조리법을 익히게 된다.
남편도 남의 집에서 날품으로 맞벌이를 나섰지만 가정생활에는 별다른 도움이 안됐던 모양이다.
3년만에 식당을 그만 둔 박씨는 어렵게 마련한 밑천으로 집에서 직접 순대를 삶아 행상에 나섰다.
대나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짚세기 신발을 동여 맨 그녀는 새벽 4시쯤이면 집을 나섰고 인근 오수와 관촌, 멀리는 완주군 신리까지 영역을 넓혀갔다.
말은 없었지만 젊고 예쁘장한 새색시가 순대장수로 길을 나섰으니 마을의 난봉꾼과 취객들로부터 봉변을 당할 것은 뻔한 이치.
하지만 집에서 곯은 배를 쥐고 칭얼대는 자식들을 생각하면 가지고 간 순대를 모두 팔아야 하기 때문에 온갖 수모를 참아내야만 했다.
그날 삶은 순대는 다음날이면 먹지 못하는 이유도 있지만 돈대신 고구마나 겉보리 등으로 셈을 할라 치면 무거운 짐까지 늘어난다.
이러기를 수삼년, 박씨는 마침내 장터 한켠에 자그마한 순대국집을 마련했다.
남편도 품팔이를 그만두고 식당일을 거들면서 형편을 조금씩 나아졌고 아이들도 어느새 6남매로 늘어났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랄까, 평소 술을 좋아하던 남편을 큰아들이 군대에 간 사이에 저승으로 떠나 보냈다.
나이 40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지만 아직도 어린 자식들이 있기에 그녀는 오랫동안 슬픔에 젖을 여유도 없었다.
그러기를 20여년, 지금의 도봉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박씨의 순대국밥은 갑자기 북적이기 시작했다.
당시 하이타이순대와 비닐순대 등으로 언론에 타격을 입었던 순대집들이 된서리를 맞으면서 전통순대를 고집하던 도봉집이 유명세를 탄 것이다.
돼지 내장을 꼼꼼히 씻어 10시간에 걸쳐 우려낸 뼛국물에 삶아내는 순대는 확실히 다른 집과는 맛에서 차이를 느낄수 있다는 게 손님들의 전언.
뿐만 아니라 별미로 제공되는 눌린 머릿고기는 일품인 데다 김치와 깍두기를 곁들여야 순대국의 제맛을 느낄 수가 있다.
때문에 신문과 방송에서는 도봉집의 전통 순대국밥 제조방식을 자세히 소개했고 소문을 들은 식도락가들은 단체로 이곳을 찾아 들었다.
이때부터 장날에만 문을 열었던 도봉집은 평일에도 식당을 운영, 연일 문전성시로 손님들이 북적였다.
일손이 모자라 딸과 며느리들이 일손을 도왔고 최근에 박씨는 '도봉집 회장님'으로 어엿한 별칭도 얻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일하기가 힘들다"는 그녀는"장사가 잘된 탓에 딸과 며느리들에 생활 밑천으로 물려줬다"고 한시름 놓은 표정이다.
박씨는 그러나 새벽이면 항상 도봉집 맛의 원천인 뼛국물 제조만은 고집하고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정성을 들여야 제맛을 낼 수 있다는 게 순대국밥"이라는 그녀는"아직도 이것만은 내 몫"이라며 전통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