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에만 해도 조산원은 낯설지 않았다. 인구가 웬만큼 있다 싶은 동네 골목엔 어김없이 조산원 간판이 있었다. 지금의 대다수 60∼70대는 이곳을 찾거나 산파를 집으로 부르곤 했다.
하지만 산부인과가 크게 늘면서 조산원은 밀려나기 시작했다. 현재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는 경우는 100명에 1명꼴도 되지 않는다. 임산부를 위한 최고의 쉼터는 산부인과로 그 바통이 넘겨진 셈.
10일 '임산부의 날'을 맞아 도내에서 가장 오래된 산부인과로 알려진 이희정 산부인과를 찾았다.
병원 중심의 인위적인 출산을 거부하고 인권이 존중되는 자연스러운 분만에 관심을 갖는 인물도 생겼다.
개인 병원으로는 전주에서 가장 오래된 전주 전동 '이희정산부인과'. 한 때 이 곳에서는 하루면 열다섯명의 새 생명이 태어나곤 했었다. 세월이 흐르고 옛 명성에 비하면 환자도 많이 줄었지만, 이희정 원장(69)은 30년이 넘도록 '이희정산부인과'를 지키고 있다. 그는 "내 손으로 받은 아이가 2만명은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운이 좋았어요. 처음에는 예수병원 산부인과 과장 출신이라고 하니까 찾아오고, 나중에는 입소문이 나면서 환자들이 많이 왔죠. 옛날에는 대학병원이나 예수병원 보다도 분만 환자들이 더 많았어요."
전남 구례가 고향. 전남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9년 예수병원 산부인과로 오게 되면서 전북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1976년 중앙초등학교 앞에 '이희정산부인과'를 개원했지만, 3년 후 팔달로변으로 이전했다. 1년 정도 먼저 문을 연 개인 산부인과가 있기는 하지만, 개원 원장이 꾸준히 진료를 보고 있는 곳은 '이희정산부인과'의 역사가 더 깊다. 예수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있을 때는 어려보이는 외모에 그를 레지던트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개인병원을 열고나서는 가끔 여자의사로 오해받기도 했다.
"옛날에는 간호사를 7명씩 두고 24시간 근무했죠. 하루에 15명 정도 받은 것 같아요. 병원 2층에 살면서 자다가도 인터폰 누르면 받고 분만하러 내려오고…. 토요일 일요일이 뭐예요? 명절도 없었죠. 애 낳는 일이 1분 1초를 다투는 일인데, 내가 바쁘다고 조금 있다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요."
당시만 해도 산부인과 전문의가 거의 없던 진안이나 장수, 부안, 정읍 등에서 환자들이 몰려왔다. '명의'로 소문이 나면서 부터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환자들이 줄을 설 정도. 그러다 보니 그가 만난 환자들의 사연도 다양하다. 어떤 산모는 딸만 다섯을 낳자 가족들이 산모만 혼자 남겨놓고 집으로 돌아가버렸다. 집에서 아이를 낳던 산모는 출혈이 심해 임실에서부터 병원으로 실려왔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세 쌍둥이 중 허약하게 태어난 두 아이를 인큐베이터에 넣을 돈이 없었던 가난한 부부를 위해서는 방송국에 부탁까지 했다. 딱한 사정이 방송을 타자 원광대학교병원에서 무료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원장 아내도 산모들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산모 배를 만지며 기도하는 이원장 아내 모습에 감동한 산모의 남편은 일본 출장길에 의료기기를 사와 선물하기도 했다.
다들 경제적으로 어렵고 아들만을 선호하던 시절. 이원장은 "그 때 영향인지 딸을 낳으면 '공주 낳았네요'라고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아들을 낳으면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게 된다"며 웃었다.
"제왕절개 비율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의사가 수입 올리려고 밑으로 낳을 수 있는 사람을 수술하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환자들의 요구도 많아지고 병원에 대한 책임도 많이 묻다 보니, 의사 입장에서는 방어 진료를 할 수 밖에 없죠. 환자들이 믿어주면 의사들도 소신껏 진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의 자녀들과 며느리, 사위까지 의사만 7명. 그 중 막내 아들이 서울대 산부인과 펠로우로 아버지 뒤를 잇고 있다. 둘째 사위도 서울서 산부인과 의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원장은 "출산률이 적어지고 다른 과에 비해 노동 강도도 세고 상대적으로 의료사고도 많다 보니 산부인과 지원자들이 줄어들고 있다"며 "나중에는 외국의 싼 인력을 들여와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환자가 퇴원할 때 '또 오세요'라고 인사할 수 있는 의사는 산부인과 의사밖에 없을 겁니다. 외과나 내과 의사가 어떻게 또 아프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 그 보람에 산부인과 의사 합니다."
오래되다 보니 태어날 때 이원장이 손수 받은 아이가 산모가 되어 찾아오기도 한다. 젊은 시절에는 직업으로만 생각하던 일이 나이가 드니 더욱 숭고하게 느껴진다. 그는 "내 손으로 우리 아이들을 받고, 또 딸들의 아이들을 직접 받으며 산부인과 의사란 직업에 진심으로 감사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