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긴 이야기가 시작했다.
"내 팔자가 그렇게 됩니다. 마흔아홉살 때 가족과 같이 운일암 반일암에 다녀왔어요. 그림을 그리고 돌아왔는데, 너무나 실망이 컸어요. 내가 저런 걸 그림이라고 그렸는가…. 연말쯤 되서 미국에서 나오는 「라이프」란 잡지를 보게됐는데, 톰슨이란 사람의 자서전 광고가 실렸더군요. 그 때 그 사람 나이가 80이 넘었는데, 나이 60에 시작해 대성공을 했더군요. 그걸 보고 나도 깨끗하게 처음으로 돌아가서 완전히 기초부터 새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공부한 세월이 35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렇게 멍청한 사람이 있을까 싶어요. 대신, 내가 왜 미술을 시작했던가 후회스럽진 않아요."
평생 그림을 그렸지만 단 한번도 전람회를 하지 않았다. 서양화가 백준기 전 전주교육대학교 교수(84)는 "나는 화가가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공부하는 맛은 기막히다.
그의 작업실은 전주시 완산동의 오래된 주택가에 있다. 젊은 시절 그에게 셋방살이를 면하게 해 준 집이었다.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이 집은 팔지 못하고 거실과 방을 터서 작업실로 쓰고 있다. 넓은 책상 위에는 여러권의 화집이 펼쳐져 있었으며, 바닥에는 석류 몇 개가 쟁반 위에 놓여있었다. 화집은 "비교해서 봐야 공부가 되기 때문"에, 석류는 "왔다갔다 보다가 그리게 되면 그리려고" 놓아둔 것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마당은 그의 사생 공간. 요즘에는 마당 나무들이 캔버스를 차지하고 있다.
"작업실에 있던 소품들은 전부 집에다 걸어놨어요. 집을 리모델링하고 싶어하길래 차라리 고운 때 묻은 놈이 더 낫다고 내가 작품으로 도배하겠다고 했어요. 그러고나서 부터 대작을 시작했죠. 6∼7년 정도 됐는데, 꼭 하나 건졌어요."
그는 "제자들은 곧 내가 좋은 작품 만드는 줄 알고 액자도 사다놓지만, 제대로 된 하나 건지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정읍 산외가 고향이지만, 중학교 시절부터 서울에서 지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빨치산으로 1년 반을 지내며 그 안에서 노동신문 만화를 그렸던 옛날 기억과 미술학원 한 번 못 다녀본 시골 촌놈이 서울에서 경쟁하며 스스로 주눅이 들어있었던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전주교대 교수가 됐지만, 다시 시작하겠다고 마음 먹은 마흔아홉살 이후로는 실기강의를 일부러 하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작가 행세를 하려면 산책을 가도 혼자서 가라고 했어요. 작가라는 게 외로워야 한다는 말이죠. 우리나라 대부분 그림이 요령껏, 그냥 적당히 그 범위에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리나라 미술을 한마디로 평하라고 하면 나는 빵점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나는 얼마나 고독한가'. 노화백은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볼 필요가 있다"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작업실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가 먼저 전화를 거는 일도 없었고, 어쩌다 오는 전화라고는 우연히 걸린 전화여론조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