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전북여성 삶의 발자취 방향전' 초대된 방애인 선생

고아와 걸인 섬긴 거리의 성자

'세상을 비관하는 성자가 아니요, 세상을 낙관하는 성자였다. 스승이 되려는 교만한 성자가 아니요, 형제의 발아래 엎드려 겸손히 섬기는 성자였다. 죄인에 대한 책망의 성자가 아니요, 죄인에 대한 눈물의 성자였다' (「조선 성자 방애인 소전」 중에서)

 

이미 고인이 된 배은희 목사는 방애인 선생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주 다가동 서문교회에서 배목사와 함께 교회 안팎에서 봉사활동을 벌였던 그를 떠올리는 유일한 증인이다.

 

배은희 목사의 '방애인 소전' (desk@jjan.kr)

'현대판 바울'로 불리는 인도의 성자 '싼다 씽'을 연상케 하는 '거리의 성자' 방애인 선생. 고아와 걸인을 섬기며 24살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가 19∼21일까지 전북대 진수당에서 열리고 있는 '전북여성 삶의 발자취 방향전'의 '발굴 여성인물'에 초대됐다.

 

황해도 황주 태생이지만, 그의 생은 전주에서 갈무리됐다. 열여덟살에 전주 기전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신여성이었으나, 온유하고 겸손한, 맑은 영혼의 소유자. 전주에서 3년간 교사로 지냈다가 황주 양성학교로 전근을 갔고, 전주로 되돌아오기까지 참된 봉사의 삶을 살았다. 선생이라기보다 학생의 어머니같은 존재였다. 아프면 밤 늦도록 기도하고, 수업료를 내지 못해 쫓겨난 학생이 있다면 위로했으며, 학업을 지속할 수 없는 이들에겐 박봉을 쪼개 졸업을 시켰다.

 

남겨져 있는 일기엔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름을 기록해 틈만 나면 그들을 위해 기도했던 흔적이다.

 

1932년 여름 수재로 전주 다가공원에 이재민들이 몰려든 적이 있었다. 거리에 방치된 아이들이 수도 없이 넘쳐났다. 집도 없고 돈도 없어 모두가 어려울 것이라고 비관했지만, 그는 믿음으로 고아원을 꾸렸다. 전주YWCA회원들과 함께 모은 100원은 전주 고아원의 문을 열게 한 금액. 방선생은 기부금을 받기 위해 아홉 번이나 부잣집을 방문하는 등 천신만고를 치렀다. 전주 교외에 시골 야학을 열어 '까막눈' 농촌 여성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가 하면 눈보라 속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을 들쳐 업고 따뜻한 보금자리도 마련해줬다. 자신은 단 한 벌의 옷 뿐이었고, 흔하딘 흔한 화장품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말 못할 고통은 있었다. 첩을 얻고, 집안의 재산을 탕진한 아버지가 마음의 짐이 됐던 것. 아버지를 위해 아침 금식기도를 해 숨을 거둘때까지 20개월간 지속했다.

 

건강악화로 찾아온 열병을 얻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전주 시내는 눈물바다가 됐다.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봤던 배목사는 짧은 생애를 불꽃같은 방선생의 삶을 기리기 위해 「방애인 소전」 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