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급 지체장애인! 내가 가진 또 하나의 신분증이다. 스물 넷에 결혼을 하여 아들 둘을 낳은 후, 의사는 '전신류머티스관절염 환자'라는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늘이 찔러대는 듯한 통증에 의식은 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과 다름없는 삶이 되어 버렸다.
갓난아이가 배고파 울어도, 아이를 들어 젖을 먹일 수가 없었다. 머리맡에 놓여진 젖병을 누운 채 물리다 보면 아이는 늘 사래가 들렸고, 기침을 하다가 젖을 토했다. 배가 고프다는 네 살짜리 큰 녀석 손에 동전을 쥐어주며 빵과 우유를 열심히 가르쳐서 보내면 아이는 배부르지 않을 껌이나 사탕을 손에 들고 왔다. 배고픈 아이에게 밥을 줄 수 없다는 내 설움에 펑펑 울어 제치면, 아이는 덩달아 서럽게 따라 울었다. 어미도 굶고, 두 아이도 굶고…….
누운 채 대소변을 해결해야 했고 숟가락을 들 수도 없었다. 통증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아픔은 남편과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누운 채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스테로이드 중독과 극심한 합병증으로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는 선고를 들었다. "미련을 버리거라. 미련을 가질수록 더욱 애착이 가는 게 삶이다. 산 사람이나 살아야지 않겠니?" 아직 숨쉬고 있는 딸을 향해 고인이 되신 친정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부모, 형제마저 포기한 목숨을 악착같이 붙잡고 있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공기 좋은 요양원을 찾아 아내를 맡겼다. 아직 땅에 소명이 남아서일까? 한달 뒤를 보장할 수 없다던 생명은 회복이 되어 띄엄띄엄 집을 찾게 되었다. 작은 녀석은 몇 달만에 손님처럼 오는 어미가 낯설어 선뜻 다가오지도 못하였다. 그러다 어미의 살 냄새가 좋다고 느낄 무렵이면 어미는 또 다시 훌쩍 집을 나섰다. 아이는 어미와 떨어지지 않으려 온 골목을 뒹굴며 울었다. 큰 녀석은 자다가도 화들짝 놀라며 어미의 존재를 확인하는 상처 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가정의 며느리, 아내, 어미의 자리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내 욕심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게는 따뜻한 밥을 해 먹이며, 옷을 빨아 줄 건강한 사람이 필요하였다.
이혼을 요구하였으나 남편은 도리질만 하였다. 부부는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니 어느 한쪽이 약하면 강한 쪽이 채우면 된다는 것이다. 3년의 요양원 생활로 목숨은 건졌으나 전신의 연골은 갈수록 말라갔다. 남편은 느닷없는 수술을 제의해 왔다. 나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입장이었다. 지방에서의 수술은 믿을 수 없다며 서울 S병원에 덜컥 진료예약을 하고, 곧바로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1989년부터 시작한 수술은 작년까지 열 번의 수술을 해야만 했다. 무릎, 팔꿈치, 어깨 주관절을 전부 인공관절로 갈아 끼우고 시간이 지나 닳아진 관절은 또 교체를 하곤 하였다.
23년 동안 아내의 병 수발을 하면서 한 번도 등을 돌린 적이 없는 남자. 불편한 아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행길 어느 곳이든, 해외에 나가서도 스스럼없이 아내를 업고 길을 걷던 남편이었다. 교사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수술비를 대면서도 아내가 집을 떠나 써야 할 돈을 마르지 않도록 공급하던 손길이었다. 결혼한 지 2년 뒤부터 사람 구실을 못하는 며느리나 올케를 곱게 봐줄 시댁은 없을 것이다. 남편은 그때마다 온 몸으로 투쟁하다시피 하여 아내의 자리를 만들어 갔다. 남편이 만들어 놓은 아내인 나의 위치는 시댁행사에 참석만 해도 나는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숱한 날, 아내의 빈자리를 보며 그가 소리 없이 흘렸을 한숨과 눈물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수술 동의서에 열 번의 도장을 찍으며 가슴은 이미 숯이 되었을 것이다. 올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큰 녀석이나, 금오공과대학에 학부 수석으로 입학하여 지금까지 전과목 A+를 받는 작은 녀석. 두 녀석은 주말이면 집에 오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아이들에게 어미의 공백을 채워 주려고 숯이 된 가슴으로 웃음을 잃지 않던 아빠의 눈물어린 헌신은 튼실한 열매를 맺은 것이다. 포기하지 않았던 사랑의 결실인 것이다.
열 번의 수술을 받고 보행이 가능한 나는 수필을 공부한다. 등단의 과정을 거치도록 도와 준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어머니. 그동안 가족들의 헌신이 부족하다는 듯 올부터 디지털대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새로운 시작에 무조건 격려의 박수를 보내던 남편과 아들들이 마냥 고맙기만 하다.
건강한 가정은 환경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약함을 강한 자가 담당하고 보완하여, 건강한 가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내가 사는 이야기를 감히 자랑하여 본다.
/유영희(전북여성장애인연대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