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과 선화공주의 로맨스는 허구인가. 1400년 동안 이어져 온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러브 스토리는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한가. 지난 19일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는 이같은 숙제에 의문을 하나 더 보탰다. 삼국유사에 실린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데 대해 아쉬움을 남겨 준 것이다.
우선 당장 서동관련 축제를 개최하는 자치단체에 여파가 미치고 있다. 해마다 서동축제를 여는 익산시와 부여군이 당사자다. 익산시의 경우 경주시와의 교류도 재검토해야 할 입장이다.
사람들은 흔히 사실(fact)에 더 후한 점수를 준다. 믿음이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발효과정을 거쳐 숙성된 설화 또한 무시해선 안된다.
이번에 발견된 사리봉안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나 백제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我百濟王后佐平沙宅積德女)" 부분이다. 종래 미륵사의 축조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의 부인이자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의 청원에 의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이번에 선화공주가 아닌 백제 최고의 관직인 좌평의 딸로 밝혀진 것이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후대에 지어낸 설화로 보는 시각에 힘을 실어준 셈이다.
그동안 이같은 주장은 끊이지 않았다. 18세기 실학자 안정복은'동사강목'에서 "(서동설화에)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 많고, 본사(本史)에도 나오지 않으므로 취하지 않는다"고 가치를 폄하했다. 또 사학자 이병도는 197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서동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24대 왕인 동성왕(東城王)이고, 그의 왕비는 선화공주가 아닌 신라 왕족 비지(比智)의 딸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서동설화의 근거가 된 삼국유사의 기록은 역사와 설화가 혼재되어 있다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단군신화나 평강공주의 얘기 또한 마찬가지다.
서동설화와 관련해 미륵사의 위치, 조성 터의 모습, 구조 등이 일치하는 것은 역사다. 반면 무왕이 용의 아들이라든지,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하룻 밤 사이 못을 메웠다는 등은 설화다. 앞으로 더 많은 해석과 반론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서동설화에서 우리는 전쟁에 지친 서민들의 희망, 백제(호남)와 신라(영남)의 화합이라는 코드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