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메아리] 설날에 본 '피어라, 남자' - 전희식

전희식(농부·'똥꽃' 저자)

이번 설에는 온 나라에 눈이 많이 내려서 누구나 설설 기는 설이 되어 버린 듯하다. 운전도 천천히 조심스레 하게 되고 집 밖에 나다닐 때도 미끄러질까봐 평소와 달리 발밑을 살피면서 걷는다.

 

뜻밖의 폭설로 땅바닥을 살펴 걷는 모습들은 조심성 많은 색시걸음이다. 말썽 많은 아이들이나 늘 큰 소리 치는 동네 아저씨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눈 길 위에서는 모두 여성성 특유의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했는데 설날에 꼭 그런 책을 한 권 읽게 되었다. '피어라, 남자'(김광화. 이루. 2009.)라는 책이다.

 

고시랑거리는 글투가 이런 식이다.

 

저자는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만날 진다고 한다. 말은 물론 논리에서도 밀려서 결국 꺼내드는 자기만의 무기가 있으니 그것은 삐치는 것이다. 싸우다 안 되니까 토라져서는 말도 안 하고 밥도 안 먹고는 드러눕는데 식구들이 안 볼 때를 골라 음식을 훔쳐 먹기도 한다는 것이다.

 

부엌에 가서 몰래 밥을 훔쳐 먹으면서도 삐친 마음을 안 풀고 토라져 있는 이 사람은 짐작과 달리 남자다.

 

속살대는 귀엣말처럼 책이 감미롭기까지 하다. 풀잎처럼 여린 남자가 나지막하게 들려주는 자기고백 같은 책이다. 저녁을 먹고 아내가 아이들한테 같이 산책 나가자고 했는데 두 남매가 다 안 간다고 하자 남편은 눈치를 살피다가 용기를 내서 아내에게 말한다. 내가 따라가면 안 되겠냐고.

 

귀엽다. 책이 귀엽고 남자가 귀엽다. 읽으면서 무릎을 칠 일도 없고 긴장할 일도 없다. 말 한마디로 집안을 쥐락펴락 하는 것이 아버지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슬그머니 내려앉게 한다. 그런데 이 남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아내에게 "여보. 나 좀 안아 줘."라고 응석을 부리고는 얼른 아내 가슴에 안겨 쑥스런 얼굴을 묻는다.(188쪽)

 

다가 올 문명의 새로운 덕목은 빼어난 개인능력이나 대중을 사로잡는 통솔력이 아니라 서로 존중하며 잘 통할 줄 아는 부드러움에 있다고들 말한다. 수용하고 보살피는 여성스러움이 얼마나 많은가가 진보의 새로운 기준이 된다고 하는데 한국사회가 여기에 한참 뒤떨어져 있다는 지표들은 수두룩하다.

 

자료를 보니 세계경제포럼(드블유이에프:WEF)에서 나라별로 소득격차와 교육기회, 정책결정권한 등으로 평가하는 남녀평등지수가 있는데 한국은 작년에 130개국 중 108위였다. 재작년에는 128개국 중에서 97위를 했다니 더 나빠진 셈이다.

 

모든 사람은 양성성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남성성을 지나치게 요구하는 한국사회는 남자들로 하여금 남성적 기질을 일찍 소진하게 하는 것 같다. 늙고 나면 제 손으로 하루 세끼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보다 여러 해 일찍 죽는다.

 

과부 3년이면 은이 서 말이지만 홀아비 3년이면 서캐가 서 말이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자립능력은 남자가 훨씬 모자라는 게 사실이다.

 

'일어서라, 남자'가 아니고 '피어라, 남자'라는 책 제목이 책장을 덮으면서야 제대로 가슴에 다가왔다. 꽃처럼, 풀잎처럼 그렇게 섬약하고 이쁜 남자의 탄생을 알리는 책이라는 사실이. 피어나는 남자들로 올 해가 가정은 물론 정치나 사회, 모든 영역에서 부드러움이 넘치고 서로 북돋고 격려하는 날들로 채워졌으면 한다.

 

/전희식(농부·'똥꽃'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