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淸)대의 가장 빛나는 지적 성과는 사고전서(四庫全書)를 편찬한 일이었다.
건륭제는 각 성(省)과 현(縣)에 보관된 희귀본과 귀중본을 조사하고, 이를 필사해 북경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다. 개인장서가들에게도 자발적으로 책을 보내줄 것을 촉구했다. 1772년 겨울 무렵의 일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사고전서 편찬작업은 꼬박 22년이 걸렸다. 1만 680종의 책을 사부(四部), 즉 경전, 역사서, 철학서, 문학서라는 사고(四庫)로 나눠 그에 대한 해제집을 작성했다. 이 가운데 3천593종을 3만6천여 책으로 다시 필사했다. 마치 책으로만리장성을 쌓는 방대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빛나는 지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편찬 과정에서 2천400여종의 책들이 파괴됐고, 약 400-500종의 책들은 개정됐다. 이를 두고 항간에서는 진시황의 분서갱유에 필적하는 '최악의 문단범죄'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청제국사의 세계적 권위자인 켄트 가이 미국 워싱턴대 역사학과 교수가 쓴 '사고전서'(생각의 나무 펴냄)는 '동양정신의 기념비적 집성' 혹은 '최악의 문단범죄'라는 평가를 받는 사고전서의 편찬과정을 탐색한 연구서다.
국내에 처음 번역돼 출간된 이 책에서 저자는 사고전서가 1770년대 후반과 1780년대 초반에 황제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진행한 검열운동이었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건륭제가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서적 수집사업을 후원하고, 당대 최고의재능을 가진 사람을 조정으로 끌어모았으며, 학문적 평판과 그 후원의 정도에서 모든 전례를 압도했다며 이는 "역사상 가장 문명화된 제국에서 건륭제 자신이 지식인 공동체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정당성을 입증해 준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중국에 있는 모든 불온서적을 수거하려는 노력이 지식인의 저항을 받았다면 커다란 진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다만 검열은 만주족 처지에서 과거에 있었던 만.한사이의 갈등을 없애고, 만주족의 관습과 유산 및 전통에 대한 한족의 경멸을 나타내는 역사기록들을 삭제하기 위해 이뤄졌고, 한족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진행했다고 덧붙인다.
저자는 사고전서 편찬작업에서 이뤄진 검열운동은 "신사.관료.황제 이익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전했고, 거의 어느 한 쪽에 의해서 지배적으로 주도되지 못한 채 이뤄졌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