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마다 정책, 사상, 신앙, 관습 등에 따라 탄생한 대단한 건축물들이 전해온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용문과 운강의 수많은 석굴 사원들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나라의 익산 미륵사, 경주 황룡사, 석굴암 등도 그 반열에 속한다.
익산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과 관련된 창간 배경에서부터 학술적으로 수많은 추측과 주장을 불러일으킨 매우 신비로운 역사 속에 있다. 특히 ??삼국유사??의 서동설화에 근거한 여러 주장들은, 그 설화체계나 상징을 잘못 해석함으로써 사실과 전혀 다른 결론을 제시한 경우가 적지 않다. 설화에서는 인간세계에서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진다. 예컨대 과부가 용과 관계하여 아이를 낳고, 못에서 미륵삼존이 출현하며, 밤 사이에 금을 신라로 보내고 미륵사를 짓기 위해 산(당시 용화산, 현재 미륵산)을 무너뜨려 못을 평지로 만드는 등의 일들이 그것이다. 또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해도, 그토록 빈번하고 처절한 전쟁을 벌인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이 어떻게 혼인 관계로 맺어지는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렵다.
설왕설래하던 미륵사의 신비가 최근 발굴된 사리장엄구의 명문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즉 무왕의 비가 신라 진평왕의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좌평의 따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왕후가 백제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사리장엄구를 기해년인 639년에 봉안했다는 확실한 연대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문제도 있다. ??삼국사기??에는 법왕에 이어 무왕이 완성한 '부여의 왕흥사'를 '미륵사'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르면 익산 미륵사와 부여 왕흥사의 존재가 불분명하다. 또 익산의 옛날 명칭인 '금마저金馬渚'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익산이 물길로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음에도 천도나 역사적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엇갈리는 상황이다.
익산 미륵사의 신비는 서서히 벗겨질 것이다. 어떤 유적에서 어떤 획기적인 유물이 나올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익산 미륵사의 역사적 중요성을 말해 주는 몇 가지를 요약해 본다.
백제는 미륵사에 당대 최대의 석탑을 축조했다. 석탑이지만 목탑식이다. 무왕이 혼인한 분은 백제 좌평의 따님이다. 따라서 서동설화에서 선화공주는 당시 백제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의 미륵선화를 상징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신라 선덕왕 643년의 기록과 같이, 황룡사 9층탑이 미륵사 9층탑을 지은 기술을 갖춘 백제인에 의해 세워졌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성숙했던 백제의 역사와 신앙과 문화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미륵사 창건시기(639)는 백제가 멸망한 660년에서 20여 년 전이다. 이때 백제의 문물은 세련의 극에 달했고 목탑식 석탑을 세울 정도로 앞서나갔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당시 백제의 선진성과 비교해 볼 때 어떤가. 약 5년 후에 정비가 마무리될 미륵사 탑과 그 유적과 주변 환경이 과거 미륵사의 위상에 맞는가. 현재의 우리의 삶과 이 유적을 어떻게 조화롭게 접목시켜야 할까. 문화적인 세련미와 심미안이 맞물린 청사진이 절실하다.
/김영원(국립전주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