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북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전주시립극단을 찾았다. 손엔'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의상 디자인이 들려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연극판에 무대의상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만들었고, 연극의상에 한지를 입히는 실험적인 무대를 마련했다.
4월 26일까지 전주한지박물관에서 한지 연극의상 전시'연극, 한지를 입다'를 열고 있는 전양배 전주패션협회 부회장(42·사진)이다. '한지입은 광대(2005)''다시라기(2006)''맥베드(2007)' 무대에 올랐던 의상들을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다.
"한지는 무대의상에 아주 잘 맞는 소재에요. 빛을 고르게 먹었다가 품어낸다고 할까요. 조명과 만나 은은하고, 안온하게 담아냅니다. 한지사 자체가 올이 잘 안 풀리기 때문에 옷 만들기도 쉽구요."
전주시립극단 창작극인'한지입은 광대'는 그의 한지 연극의상을 선보인 첫 작품. 교육현장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낸 무대에서 한지 의상은 배우가 더 살아나게 하는 마력을 뿜어냈다. 무대에 오르면 색감보다 재질감이 눈에 더 잘 띄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구겨진 듯한 골이 조명과 만나면서 입체감이 돋보인다고 설명했다.
"한지옷은 '뻐셔서'과장되게 보이는 감도 있습니다. 배우도 커 보이게 하고, 동작도 과장되게 보이게 하죠. 풍자극 성격을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는 소재입니다."
'다시라기'는 우리나라 전통 장례문화를 해학적으로 꾸민 극이다. 그는 삼베로 만든 상복의 까슬까슬한 느낌과는 다르게 한지는 꼬깃꼬깃한 느낌으로 민초들의 투박한 삶을 살려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닥섬유를 조형해 겹쳐 만든 갑옷과 투구를 만든 '맥베드'는 한지 의상의 결정판. 갑옷을 만드는데 3주가 꼬박 걸렸다는 그는 한지의상으로 딱딱하지 않으면서도 갑옷의 묵직한 느낌을 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의상에 문양을 새겨넣는 일은 기성복보다 더 간편해 한 벌만 제작하는 연극의상엔 안성맞춤이라는 설명이 덧붙어졌다.
옷이 소리낸다는 점도 한지 의상의 특징. 옷이 씻기는 소리로 연극인들의 과장된 연기가 가능해진다고도 했다.
"관람객들이 전시장에 가면 '아, 이게 한지야?'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할 겁니다. 한지의상에 관해 잘 모르더라도, 갑옷이 어떤 장면에서 등장하고, 상복이 어떤 질감으로 만들어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스토리가 있는 전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갑옷의 경우 직접 입어볼 수 있도록 체험 코너도 마련했구요. 다만 모든 무대에 한지의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한지의상이 무대에서 빛나는 조연, 감초로 비춰질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