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백제말 왕도 재확인

왕궁리 유적 발굴조사 20주년 국제학술대회

익산이 백제말기 왕도였다는 사실이 왕궁리 유적 발굴 조사를 통해 재입증받게 됐다.

 

김삼룡 전 마한백제문화연구소장(전 원광대총장)은 9일 원광대 6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익산 왕궁리유적 발굴조사 20주년 기념국제학술대회에서 '익산문화권에서의 왕궁 유적의 위치'란 주제 발표를 통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 20년 동안 벌인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한 왕궁리 유적에 비춰볼때 익산이 백제 무왕의 천도지였음을 다시한번 확인받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이어 김 전 소장은 "왕실 생활의 일부를 보여주는 거대한 궁궐지와 정원시설, 왕과 궁인이 사용했던 화장실 유구는 물론 나무 막대기 등의 생활유물, 금은 세공품, 도가니가 발굴된 것은 물론 '명문와당'은 이곳이 수도였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고 덧붙였다.

 

'관세음응험기'를 통해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알수있다고 강조한 김 전 소장은 "백제 무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정사를 지어 경영했는데 정관 13년(639년) 기해년 11월에 뇌우로 제석정사가 소실되었다는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은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를 잘 규명하고 있다"피력했다.

 

김 전 소장은 "최근 밝혀진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장엄중 사리기에 나타나있는 어자문(魚子文)이나 연꽃문양이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함의 문양과 일치하고 있는 것도 백제 무왕의 익산 천도설을 입증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부여 능산리 고분과 동일한 시기에 조성된 '쌍릉'또한 송산리·능산리고분이 공주와 부여의 왕도시기 백제 왕릉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무왕이 익산에서 왕도를 경영하다 서기 641년 세상을 떠나면서 만들어진 능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소장은 "왕궁리 유적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 무왕이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사실이 그림 퍼즐처럼 하나둘씩 완성되고 있다"면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숫한 문헌자료를 통해 백제시대 익산의 모습을 알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