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窓] 한광옥의 아름다운 뒷모습 - 김성중

김성중(정치팀장)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 선거는 꽃보다는 쓰레기 쪽에 가깝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렇고 내일도 그럴 것이다. 민주주의에 익숙하지 않았던 한국인들의 투표율이 처음에는 높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낮아지는 현상만 봐도 그렇다. 더러운 건 피하는 게 사람의 심리니까.

 

그럼에도 선거판에는 항상 신선한 향기를 내는 인물들이 있다. 정치가 뿜어내는 악취에 코를 쥐었던 유권자의 두 손가락을 슬며시 놓게 하는 그런 향기 말이다. 이런 정치인들이 있기에 우리는 정치에서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을 본다.

 

한광옥. 전주북중·서울대 졸업. 1981년 제11대 민한당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 평민당 국회의원과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 및 부총재,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민주당 상임위원. 물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라는 이력도 빼놓을 수 없다. 예컨대 전북 출신 거물 정치인이다.

 

그런 그가 말년에 고향 전주에서 실시되는 재선거에 나왔다. '웬 출마냐'라는 지적도 있었고 결과는 경선 패배. 민주당에서 마련한 경선 방식은 처음부터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조직력 부재가 가장 큰 단점이었던 것. 하여, 경선 정글을 탈출해 무소속 출마한다는 설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큰 길을 선택했다. 참모들은 무소속에 승산이 있다고 강권했지만 그는 경선을 완주했다. "정치인은 자신의 유불리만 따져 행동해서는 안 된다. 당 대표를 지낸 사람이 당을 떠나서야 되겠느냐"며 유혹을 과감히 뿌리쳤다. 정세균이 그토록 강조한 선당후사다. 그리고 경선 운동기간 시민들의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다. 가슴이 뛰었을 것이고 승리가 다가온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고향에서의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는 중대발표를 준비했다. 모두들 뭔가 터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 그의 말 한마디는 선거판을 흔드는 파괴력이 있다. 취재진이 몰려갔고 그의 입을 주시했다. 하지만 언론은 맥이 빠졌다. '경선을 겸허히 수용한다'가 중대발표의 핵심이었던 것.

 

오히려 기자는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바로 그 말이 진짜 중대발표로 다가왔다. 앞서 말했듯 불복과 배신의 선거판에 승복과 수용의 태도야말로 정말로 중대한 결심이자 의미있는 발표 아닌가. 향기는 그렇게 다가왔다. 다음날 그는 "나도 사람인데 패배를 수용하고 시인하는 게 쉽겠느냐"고 소회를 밝혔다. 그래서 그의 향기는 더욱 값졌다.

 

한 가지 더. 한광옥은 이렇게 말했다. "국회의원이란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국민에게 정치인의 정도와 승복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보라. 재선거가 열리는 전주의 모습을.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고 눈 감고 듣기 힘들다. 이름을 거명하기도 지쳤다.

 

그래서다. 정치 혐오증에 시달린 우리에게 오랜만에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준 노정치인 한광옥. 그는 배반, 음모, 모략이 넘실대는 격랑의 정치사에 남다른 메시지를 던졌다. 또 있다. 고심 끝에 출마를 접은 김대곤·한명규 두 전 전북도 정무부지사다.

 

혼탁한 선거판에 향기를 뿜어낸 이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새로운 꿈을 선물해줘야 옳다.

 

/김성중(정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