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1335~1408)의 초상화는 그분이 이룬 '조선 건국'이라는 역사적 대업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태조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앞에 서면, 창업 군주로서의 위풍당당한 면모에 보는 이들은 숙연해지며 압도된다. 태조의 역사적 위대함은 그림의 여러 부분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림 속의 태조는 푸른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거의 실제 인물 크기로 그려졌기 때문에 왕을 직접 마주보는 듯하다. 머리와 수염이 하얗게 센 노년의 왕에게서는 위엄이 느껴진다. 태조가 입고 있는 곤룡포와 의자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고, 용의 5개 발톱 역시 지존을 의미한다. 청색 옷과 적색 의자는 색상에서도 강하게 대비된다. 단정한 대칭 구도의 태조 어진은 엄격하고 권위적이며 강렬하다.
조선시대에는 도화서圖畵署라는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았던 관청이 있었다. 이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원畵員들은 왕실의 초상화, 궁궐 내 각종 의례와 행사 등을 그렸다. 따라서 왕과 왕비의 초상화는 도화서 화원들이 그렸다. 그런데 초상화 외에 왕실의 잔치나 왕의 행차 등을 그린 그림에선 왕이나 왕비의 모습은 그리지 않았다. 다만 그 분들을 상징하는 물건을 두어 암시적으로 표현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태조 어진의 특별 관리를 위해 전국적으로 6곳에 어진을 모시는 건물인 진전眞殿을 세웠다. 그 하나가 전주의 경기전慶基殿이며, 다른 곳의 태조 어진은 모두 없어지고 경기전의 어진만 유일하게 남았다. 더욱이 왕의 초상화로 태조 어진만큼 온전히 전해 오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가치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은 태조가 돌아가신 후 2년째 되는 1410년 처음 그려졌다. 이후 어진이 낡게 되자 1872년 원본을 그대로 베껴 그렸는데, 그 모사본(베껴 그린 그림)이 현재 경기전에 소장된 것이다. 모사본이라도 1410년 원본을 그대로 그렸고, 왕의 초상이기에 그 의미는 각별하다.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관련된 숙종 때의 일은, '어진의 모사'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숙종이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한양에 모셔다 모사한 일이 있었다. 숙종은 이 모사 작업을 직접 지휘했다. 그리고 완성된 모사본을 한양에 모심으로써 국초의 전통과 기강을 세우고 조정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었다. 태조 어진이 한양에 도착할 때와 전주에 되돌아 갈 때, 숙종은 직접 마중 나가고 배웅했다. 이처럼 어진은 모사본이라도 특별한 장엄의 의미를 갖는다.
노년에 접어든 왕을 그린 태조 어진이 일주일 후 국립전주박물관 전시실에서 내려온다. 환경에 민감한 유물이므로 일정기간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뒤를 영조(1694~1776)의 초상화가 오른다. 아직 왕세제로 책봉되기도 전, 연잉군延?君 시절의 초상화이다. 원본은 1714년 그려졌고 전시품은 모사본이지만, 청년 영조의 모습을 잘 전해 준다. 숙종의 아들로 탕평책을 이끌고 사도세자의 애환을 품은 영조. 21살 청년 영조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김영원(전주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