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럴 때면 혼란스럽다. 나도 잊고 있는 나에 관한 것들을 다른 사람이 기억할 때. 특히나 그 기억이 상처였을 때. 다른 사람을 통해 그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프고 불쾌한 일이다. 나는 그 기억을 잊은 것이 아니라 애써 잊으려 했던 것이었을까.
<디지털 삼인삼색 2009 : 어떤 방문> 은 세 편 모두 누군가의 방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디지털>
홍상수 감독의 '첩첩산중'. 문학을 공부하는 '미숙'은 선배 '진영'이 있는 전주를 방문한다. 그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선생 '전상욱'과 '미숙'은 옛날 애인 사이, '진영'은 공개되진 않았지만 '전상욱'의 현재 애인이다. '미숙'의 옛 남자친구 '명우'까지 전주에 내려오면서 상황은 꼬이고 꼬여, 넷은 이른 아침 모텔촌 앞 한 식당에서 만나게 된다. 물론, '미숙'은 '명우'와 '전상욱'은 '진영'과 함께다.
농민운동하던 막걸리공장 사장이 준 시계를 차고 다니면서도 제자들과 잠자리는 하는 유부남 '전상욱'은 이중적인 지식인의 표상이 아니던가. 이 영화의 '주제' 역시 '형이상학적 욕망'이다. 이 모든 것이 첩첩산중. 이럴 때면 카메라는 아파트 끝이나 나무 끝, 허공에 떠있는 모텔들의 간판을 훑을 수 밖에 없다.
평범한 일상의 한페이지같은 영화. 상황이나 기분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여성화자의 나레이션이 의외인 것 빼고는 홍상수다운 영화다.
다음. 가와세 나오미의 '코마'에는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밤에만 찾아오는 남편 옷에 실을 꿰어놓았다가 다음날 찾아가 보니 삼나무에 실이 연결돼 있었다는 설화를 가진 미와산, 그리고 그 산이 수호해 주는 마을 '코마'. 70년 전 이 마을을 방문한 한국인 남자는 우연히 한 아이의 목숨을 구하게 되고 고구려 왕이 그려진 족자를 선물받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의 손자인 '강준일'이 족자를 돌려주기 위해 '코마'를 찾게 되고, 그 곳에 입양돼 자란 한 여자는 '강준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다. 한국의 전통 판소리와 일본의 민요가 흐르는 위로 재일동포 3세 남자와 일본 여자의 교감이 이뤄지고, 한일관계와 전통의 계승이란 메시지는 조용하지만 깊게 각인된다.
마지막. 라브 디아즈 감독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는 롱 테이크 샷의 연속이다. 여기에 흑백화면으로 담긴 거칠고 고달픈 삶은 짐이 되어 보는 이들에게 많은 인내를 요구한다.
캐나다 금광회사가 문을 닫기 전까지만 해도 부유했던 필리핀의 섬사람들. 그러나 금광회사가 철수하자 사람들은 절망에 빠져 술만 마신다. 어느 날 금광회사가 있던 시절, 이 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캐나다 여성이 섬을 방문하게 되고 옛날엔 친구였던 필리핀 사람들은 그 여성을 납치하기로 한다.
실제 장소에서 같은 사건을 겪은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는 픽션이지만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게 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과거 다국적기업이 가져다 준 경제적 번영의 테두리 안에서 갇혀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영화 제목 속 '나비'는 필리핀 사람들의 기억력을 뜻하는 것. 캐나다 여성을 납치하기 위해 숲 속을 가로질러 가는 장면에서는 풀숲에 숨어있던 나비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른다.
이처럼 외부인의 방문은 그 곳에 살고있던 사람들의 의식을 깨운다. 그래서 우리는 이방인을 경계하는가.
남은 상영은 6일 오후 2시 CGV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