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년간 잠들어 있던 전통 사경의 예술성을 되살렸다는 평을 듣는 외길 김경호(47) 한국사경연구회 회장이 역시 오랜 세월 맥이 끊겼던 전통 탑비(塔碑) 양식의 현대적인 부활에 나섰다.
경기 양주의 사찰인 오봉산 석굴암에서 열반한 초안(속명 송만석.1926-1998) 선사의 탑비가 최근 그에 의해 1차 작업이 완료된 것. 1차 작업이란 비문에 들어갈 글과 문양을 종이 위에 제작하는 작업으로, 석공이 그대로 돌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
"불교가 발전했던 옛날 국사나 왕사 등의 전통적인 탑비는 지금처럼 비신(비석의 몸체)에 행장을 기록한 글만 새겨진 게 아니에요. 800여 년 만에 전통 양식을 되살렸다는 자부심과 함께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전통 탑비 양식은 1085년에 세워진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비에서 볼 수 있듯이 비신의 테두리와 윗부분에 극락세계를 상징한 그림과 아름다운 무늬를 담고 있지만 고려 말을 거치면서 상징은 도식화됐고 1150년대 이후에는 아예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이번에 사찰 의뢰로 제작한 탑비는 옛날 양식을 참고했을 뿐 아니라 불교 경전인 아미타경(阿彌陀經)에 표현된 극락세계를 참조해 흩뿌려내리는 꽃, 악기 등 상징성을 보완하고 우주선, 휴대전화, 폭죽 등 현시대의 상징물까지 반영했다.
비문 역시 동국역경원장 월운 스님이 쓴 글의 내용을 한문 해서체와 한글 궁서체를 섞어 품격있는 서예로 썼다.
그는 전통 탑비 양식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데 대해 "서예가들도 탁본을 통해 옛 양식을 봤겠지만 오래 잊혀 있던 문화이다 보니 심각하게 고민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서예가로서 많은 탁본을 접해온데다 사경변상도 작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제 의식을 갖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경변상도는 금, 은가루로 불교 경전을 쓰면서 글의 내용을 그림으로도 담는 서예, 회화, 공예의 요소가 집약된 종합예술이지만 억불숭유 정책을 편 조선시대를 거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서예를 배워 일찍이 전국 학생서예대회에 출전,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휩쓸다가 고교 시절부터 사경에 빠져 부모 몰래 세 번이나 출가하는 등 독특한 이력을 걸었으며 이런 외길 인생 덕분에 1㎜의 공간에 5-10개의 선을 그을 만큼 치밀한 경지에 올라 국내에서는 사경 분야의 1인자 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아직 일반인들의 사경에 대한 예술적인 이해도는 낮은 상황이다.
그래서 소더비 등 해외 경매 출품도 시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다시 또 다른 전통 양식의 부활에 매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먹구구로 탑비가 제작되는 데 대해 경종을 울리고 싶어요. 좋은 전통을 살린 예술작품을 후대에 물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