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칼럼] 사대부의 소박한 정신 공간 - 김영원

김영원(전주박물관장)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유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학자로서 관직에 오른 사대부(士大夫)가 세상을 주도했다. 그들은 절개를 지키며 순결하고 고상한 생활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다. 학문에 정진하면서, 시를 짓고 서예를 익히며 그림을 그림으로써 교양과 예술을 함양하고 스스로 수양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러므로 사대부들이 기거하던 사랑방에는 항시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쓸 때 사용하는 용기들이 즐비했다. 연적, 필세(筆洗: 붓 씻는 그릇), 벼루, 필통(붓 꽂는 통), 지통(종이를 말아 넣는 통) 등등. 이런 문방구들은 대부분 크기가 작고 기형도 간소하여, 사랑방을 장식하는 단촐한 목가구들과 잘 어울린다.

 

조선의 한옥은 방의 크기가 작기 때문에 가구들과 생활 용기들이 작을 수밖에 없다. 목가구는 장식이 번잡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오히려 매우 간결하고 수수한데, 이는 꼭 필요한 선과 면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갑이나 서안(書案: 책상) 위에 놓이는 물건들도 작고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그것을 애용한 사람들의 품성을 짐작할 수 있다.

 

필자의 눈을 끄는 우리 문화재 가운데에 높이가 5~6cm 정도의 작은 백자가 있다. 이 백자 항아리에는 국화 한 송이가 그려져 있는데, 국화가 지조와 기품과 고결함을 상징하므로 그것을 덕목으로 삼은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품성과 잘 맞는다. 국화가 매화, 난초, 대나무와 함께 문인화의 대표적인 소재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국화가 그려진 이 백자 항아리는 사랑방 목가구 위에 놓여 주인의 품격을 대변해주는 사대부의 애장품이었다.

 

그런데 '국화문', '백자 작은 항아리'와 관련된 흥미로운 고문헌 기록이 전해 온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세제(世弟)로 있던 시기(1721-1724)에 분원(分院) 관요(官窯)의 관직을 맡았던 일이다. 왕세제였던 영조는 직접 자기의 제작에 관여했다. 그는 산수, 난초, 국화, 매화를 도자기의 밑그림으로 손수 그려 '작은 항아리'를 구워 오도록 서리(書吏: 하급 관리)에게 전해 주었다. 그런데 그 밑그림의 필치가 묘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왕실 백자를 제작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廣州)에 특별히 분원 관요를 설치했다. 분원의 총책임자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중 한 사람, 또는 종친이 맡았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사대부까지 의례나 일상에서 백자를 애용했다. 영조의 세제 시절, 그가 서리에게 그려 준 국화문이 바로 이 작은 백자 항아리의 국화문이 아닐까.

 

필자가 좋아하는 이 백자 국화문 항아리는 작지만, 아담하며 자기의 품질도 뛰어나다. 항아리에 그려진 국화는 실제 모습 그대로 묘사되지 않고, 백자의 하얀 바탕 위에 몇 군데 붓질만으로 국화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구도 역시 번잡하지 않다. 모든 것이 매우 절제된 가운데, 한 송이 국화가 쓸쓸한 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고고하게 피어오른 모습이다. 한 폭의 사군자화를 보는 듯하다. 이렇게 사랑방 목가구와 백자는 소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조화를 이룬다.

 

/김영원(전주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