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세스',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 등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책장, 디자인 관련 표창장과 건축자문 위원 위촉장, 오디오와 CD들…. 건축가 겸 가수 양진석(44)의 사무실은 그의 다양한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
1996년 '양진석 디자인 그룹'으로 출발해 현재는 100여명의 직원을 둔 '와이그룹'의 대표이기도 한 그는 사실 1995년 1집을 내고 데뷔한 싱어송라이터다.
'증권맨'이면서 싱어송라이터인 김광진이 '투잡 족'이라면, 그는 현재 한양대 건축학부 겸임교수로 7년째 강단에도 서고 있어 최소한 '3잡 족'이다.
라디오 DJ, MC로도 활약하고 MBC TV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코너 '러브 하우스'에 건축가로 출연하며 유명세를 떨친 그는 2001년 3집 이후 방송 활동을 접고 본업에 충실해왔다.
그가 지난 16일 8년 만에 4집 '어반 라운지(URBAN LOUNGE)'를 발표했다. 작곡가 권태은과 공동 작업한 음반으로, 이번에도 손수 작사, 작곡을 했다.
와이그룹 사무실에서 최근 인터뷰를 나눈 그는 갑작스러운 방송 중단에 대해 "당시 건축업을 성장시킬지, 연예계를 주업으로 택할지 진로를 선택해야 했다"며 "당시 내 별명이 '틀면 나와'였다. 고민 끝에 본업은 건축가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어 새 음반이 나오기까지 8년이 걸린 데 대해서는 "원하는 음악 색깔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내고 싶지 않았다. 작업 도중 엎은 것만 2~3번"이라고 껄껄 웃었다.
그가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음악 방향은 음반 부제인 '어쿠스틱 솔'. 미디 장비가 아닌, 실제 악기가 연주하는 사운드에 흑인의 그루브(흥)가 살아있는 솔을 접목했다. 이 틀 안에서 수록곡은 솔, 모던 포크, 펑키 등의 개성을 살려 변주했다. 빠른 템포의 '후크 송(Hook Song)'에 찌든 귀에 편안한 휴식을 주는 사운드가 주를 이룬다.
"아침에 출근하면 스티비 원더 음악부터 틀어요. 그런 음악을 하고 싶죠. 사실 시도는 2, 3집 때부터 했는데 1집 때는 조동익 씨가 프로듀싱을 해 그의 색깔이 가미됐고 2집 때부터 손수 프로듀싱 하면서 그런 색깔을 서서히 드러냈죠."
타이틀곡 '이제 다시 살아보려 해'는 기타와 피아노 사운드가 바탕이 된 어쿠스틱 발라드로 보컬에 솔 창법을 가미했다. 타이틀곡 후보로 경합한 '센티멘탈 러브(Sentimental Love)'는 여름을 겨냥한 펑키한 사운드가 귀에 감긴다. 네오 솔인 '영화처럼', 블루스와 1980년대 복고 팝을 연상시키는 '오 마이 라이프(Oh, My Life)'는 음반의 지향점을 담았다.
"노라 존스의 음악을 컨트리, 제 음악을 김광석의 포크라고 하지 않듯이, 크로스 오버 과정에서 어떤 정신을 받느냐가 중요해요. 저의 정서는 흑인 음악이지만 사운드는 어쿠스틱, 포크, 재즈가 가미돼 궁극적으로는 컨템포러리 음악입니다."
그는 자신이 건축가이기에 컨템포러리 음악이 가능하다고 했다. 건축과 음악의 정신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
"건축은 보수적이고 공학적이고 철학적이지만 생명은 동시대를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악에도 시대의 철학, 가치관을 담아야죠."
또 그는 "음악의 사운드는 건축에서는 구조"라며 "사운드를 잡는 믹싱 과정에서 엎은 적이 많았던 것도 탄탄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건축이 공학적으로 튼튼해야 하듯이 음악도 사운드의 질이 바탕"이라고 강조했다.
가사를 쓰면서는 요즘 노래들에 인문학적인 고민이 담겨 있지 않아 안타까웠다고 한다.
"가사 쓰는 사람들이 너무 책을 안 읽는 것 같아요. 마치 5분짜리 생각이 담긴 듯이 영화의 한 장면이나 CF 같죠. 이번에 고루한 가사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제가 아무리 직설적으로 써도 귀에 안 꽂힌다더군요. 엔지니어가 '형, 가요계의 홍상수야? 요즘 가사에 안 쓰는 말이 너무 많다'더군요."
건축가이면서도 그가 음악에 대한 고집스러운 가치관을 가진 것은 오랜 경력 덕택이다.
그는 성균관대 건축학과 1학년 때인 1984년 롯데 가나 초콜릿 CM송을 작사, 작곡 녹음해 응모에 당선됐다. 이후 1985~86년 한동준, 김한년, 지근식과 함께 '노래그림'이라는 어쿠스틱 밴드로 활동했다. 1988년 5월 노래그림 1집이 나왔지만, 그해 5월10일 교토대학 건축학과에서 석, 박사 과정을 밟으며 음악 활동을 잠시 접었다.
"사실 변진섭 씨의 히트곡인 '새들처럼', '너무 늦었잖아요' 등이 지근식 씨가 작곡한 노래그림 노래였어요. 우리가 '강호'에서 히트했던 노래인데 변진섭 씨가 우리 공연을 보고 '노래 좀 달라'고 해서 줬는데 크게 히트한 거죠."
7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95년, 김광진이 작곡한 1집 타이틀곡 '만나기까지'를 냈고 이 곡은 '그게 바로 너였어'라는 제목으로 MBC TV '사랑의 스튜디오' 주제가로 히트했다.
그는 공들여 과거 얘기를 하나 둘 풀어내더니 종착에는 2004년 결혼한 아내와의 만남으로 이어갔다. 그의 아내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김주현 씨로 부부는 세 살 배기 딸을 뒀다.
"독일에서 활동하던 아내가 협연을 위해 한국에 들어왔을 때,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의 파티에서 만났죠. 아내가 제게 '양진석 씨 아니냐'며 제 1, 2집을 모두 갖고 있다고 말해 놀랐죠. 아내는 영화음악, 팝 등 여러 장르의 마니아인데 제가 완성도 높은 음악으로 나아가는 데 큰 힘이 되죠. '당신의 음악과 가사에는 이런 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늘 조언해줘요."
그는 7월14~15일 서울 광진문화예술회관 나루아트센터에서 단독 공연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