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힘 2050] "환경은 열악했지만 배움의 열정 대단했죠"

1970년대 익산서 평화봉사단 활동했던 美 뉴점여사

1970년대 당시 이리여중(현 익산지원중)에서 평화봉사단 활동으로 영어를 가르쳤던 뉴점여사가 7일 익산지원중학교를 찾아 당시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desk@jjan.kr)

'눈 파란 한국인이다'. 미국인이지만, 정서는 한국과 맞닿아 있었다. 뉴점 여사의 한국 이름은 우난희. 불고기와 잡채를 좋아해 미국에서 회갑연을 가졌을 때에도 한국 음식을 마련했을 만큼 한국에 대한 향수가 짙다. 1970년대 당시 평화봉사단(피스코)으로 한국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이리여자중학교(현 익산지원중학교)를 파견됐다. 30여년 전 청춘을 불태우고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긴 그가 7일 오후 2시 익산지원중학교를 다시 찾았다.

 

"학생들이 제게 준 편지까지 고스란히 다 간직하고 있어요. 미국에 있는 동안 한국을 참 많이 그리워했습니다. 여기가 제 고향인가 싶을 정도로."

 

평화봉사단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인생의 2년을 개도국에서 봉사해 세계평화에 기여하자"는 공약에서 출발했다. 뉴프런티어 정신을 이어받아, 반전·평화주의에 관심이 많았던 당시 젊은이들에게 각국에 파견된 것.

 

그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귀밑 단발머리 여학생들에게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시간씩 수업을 했었다고 떠올렸다. 교실이 부족해 음악실에서 영어 수업을 했을 만큼 환경은 열악했지만, 배우고자 하는 아이들의 열의는 대단했다고 말했다.

 

"영어 회화를 유도하려고 양말로 인형을 만들었더랬습니다. 양쪽 손에 끼어서 가상 인형극을 했죠. 아이들이 갖는 영어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싶었어요."

 

어눌한 한국말이었지만, 차분히 말을 이어간 그는 한국을 떠난 후에도 학생들에게 엽서를 보냈을 만큼 한국의 정(精)을 그리워했었다고 말했다. 당시 뉴점 여사의 제자로 수업을 받았던 김형자 익산지원중학교 교사는 "선생님은 이후 그리스 여행하면서 파르테논 신전을 배경으로 한 엽서를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그 때 선생님의 가르침으로 영어 선생님이 됐지만, 학생들을 위해 헌신했던 자세는 절대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뉴점 여사는 김씨를 비롯한 10명 동창생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지난 익산지원중학교 학생들의 사물놀이 공연을 관람했다. 이제는 단발머리 여중생이 아닌 머리가 제법 희끗희끗해진 제자들과 마주 앉아 뜨거웠던 추억을 회고하면서, 눈시울을 붉힌 그는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초반으로 돌아간 듯했다. 기념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추억 속의 한국 노래가 저절로 입에서 입으로 퍼졌다.

 

/박영숙 여성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