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도시와 도시의 브랜드 가치를 자국 혹은 세계의 시민에게 인지시키는 일은 지난한 일이다. 바다나 산 등 빼어난 자연경관 혹은 역사적 사건 그리고 자본의 확충으로 이름난 도시도 미디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각인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한 도시의 이미지를 알리는 데는 각고의 노력과 함께 천문학적인 돈이 든다. 그렇다면 문제는 모두 돈인가? 과연 그런가?
산업적 측면에서는 오래도록 소외되었지만, 맛과 소리를 갖춘 '천년 고도'라는 이미지로 전통을 추구한 도시 전주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세계에 그 이름을 알리는데 성공했다. 2002월드컵과 국제영화제를 개최한 것. 월드컵은 한번으로 그치는 행사지만 국제영화제는 벌써 10년의 연륜을 쌓았다. 그래서 전주는 영화제를 개최하는 도시, 영화의 배경이 되는 도시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도시를 넘어 '영화, 전주!'란 새로운 도시 이미지와 문화콘텐츠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 10회 넘긴 전주국제영화제
도시의 인구수 혹은 자본에 대한 잣대를 놓고 볼 때, 중소도시 전주에서 개최한 국제영화제는 부산 못지않은 성공의 모델로 읽힌다. 휴양지로서 바다도 없고 경제력도 부족한 전주의 성공은 좋은 작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한 프로그래머 그리고 자원활동가들을 비롯한 조직위와 사무국의 헌신적 노력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그것뿐일까? 역시 이 배경에는 판소리를 비롯한 한지나 음식문화 그리고 많은 문화재 등 도시의 궁금증을 일으키는 지역문화 인프라가 존재할 것이다. 영화제를 묵묵히 지켜보고 성원해 준 시민들의 힘은 말할 것도 없다.
10회를 넘긴 전주국제영화제의 성공을 조금 자세히 들여다보자면, 내용면에서 세계의 어떤 영화제보다 진취적인 영화제라는 자기만의 색깔을 갖게 된 것이 중요 포인트일 것이다. 부산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에 무게를 둔다면, 후발주자 전주영화제는 '영화'에 중요한 가치를 둔 것. 국가라는 정체성에 함몰되지 않고 '자유, 소통, 독립'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기 위해 비내러티브의 독립영화나 아방가르드한 실험영화, 디지털 영화와 다큐멘터리에 과감히 자리를 내어주는 배짱과 '불면의 밤'을 시도하는 여유는 마니아들을 사로잡았다.
부산이 주류영화로 갈 때, 전주가 보여준 쿠바나 중동, 아프리카, 중앙아시아의 영화에 대한 소개는 학습의 장으로서의 성공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영화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벨라 타르, 허우 샤오시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파올로 파졸리니 등 혁신적인 영화미학을 선보인 세계 거장 감독들의 작품을 소개한 회고전은 중요한 이력이다. "중국의 차이밍량이나 태국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등 세계영화의 기린아들을 발굴하는 '기막힌 눈'을 가진 영화제"라는 것이 전찬일(부산국제영화제 월드영화 프로그래머)씨의 평가이다.
고민도 많다. 이러한 전문가적 평가 뒤에 따르는 지역민들과 함께하는 영화제라는 지향점 말이다. 전북 지역 감독을 소개하는 로컬섹션은 그런대로 위안이지만 영화제를 어렵게 바라보는 시민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은 여전히 과제다. 올해의 폐막작 <마찬> 에 보낸 박수가 그 열망을 증거하는 것이리라. 마찬>
전주국제영화제는 부분경쟁을 도입한 비경쟁영화제이지만 경쟁부분을 강화하고 시상금을 올리는 문제 역시 고민거리다. 그리고 시상의 명칭부문에서 칸의 황금 종려상 혹은 베를린의 금곰상처럼 전주도 이 지역의 정체성에 맞는 이름을 갖는 상의 마련에 대해 영화제는 고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쉬리상' '태극선상' 등 어떤 것이 좋을지는, 역시 시민들의 참여가 중요할 듯.
▲ 수십년 함께 한 일상공간, 영화의 거리
홍콩이나 부산 전주의 공통점이 있다면 영화제의 개최도 그렇지만 영화의 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홍콩이 서극, 오우삼, 성룡이나 이소룡 등 감독과 스타를 기념하기 위한 경관거리라면 해운대는 영화제 전용 거리다. 이에 반해 전주는 그야말로 수십 년 전부터 여러 개의 극장이 자리한 일상공간거리인 것이 차이점일 것이다. 그러면 그냥 극장이 널려있어서 영화의 거리일까? 아니다. 전주는 <아리랑> (1953), <피아골> (1955) 그리고 한국 최초의 16mm 컬러영화인 <선화공주> (1957)를 완성한 50년대 영화제작의 메카였던 것. 거리는 오래되고 건물들은 낡았지만 전주의 영화의 거리는 영화 역사를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다. 물론 그사이에 명멸한 극장과 거기에 얽힌 전주사람들의 추억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선화공주> 피아골> 아리랑>
전주는 걸을만한가? 그렇다. 영화의 거리는 매력적이고 풍요로운가? 골목골목에 맛집이 숨어있으니 당연히 그렇다. 그런데 영화의 거리가 너무 좁지는 않을까? "가로등 벽화 루미나리에 등 몇 가지 변화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너무 좁다. 영화의 거리가 최소한 전주천 부근까지는 확장되어야 한다"고 김 건(전 사무국장, 건시네마 대표)씨는 주장한다. 쉬리가 노는 전주천 둔치에서 야외상영을 하는 문제도 검토해 볼 만하다.
하나 더. 영화의 거리를 비롯한 전주의 수많은 영화촬영지에 대한 안내가 되는 조형적 표현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이에 대해 지수영(전주영상위원회 홍보팀장)씨는 "올 초 전주영화촬영지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완성해서 책을 엮었고, 곧 시내 10군데에 영화촬영지를 안내하는 입간판을 설치할 예정"이라고 했다. 서둘러야 할 것이다.
▲ 영화종합촬영소·영화제작소
2008년에는 날씨와 관계없이 전천후 영화촬영이 이루어지는 전주영화종합촬영소가 전주대 너머 상림동에 들어섰다. 서전주톨게이트에서 10분 거리니 서울에서의 접근성이 좋고 바다를 향하는 데도 채 한 시간이 안 걸리는 최적의 위치다. 당연히 야외 세트장도 있다. <쌍화점> 과 <전우치전> 등이 촬영되었고 현재 <순수의 시대> 가 촬영되고 있다. 황정민이 주연한 시대 탐정물 <그림자 살인> 촬영 때는 야외세트장이 1920년대 경성으로 탈바꿈되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이 야외세트가 학생들의 현장체험학습의 장이나 관광상품으로 활용되지 못하고 곧바로 철거돼 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영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경기전과 한옥마을을 방문하는 수학여행단의 일정과 코스를 조정하는 연결고리가 필요할 듯하다. 그림자> 순수의> 전우치전> 쌍화점>
전주영화종합촬영소 건립에 이어 올해는 영화후반작업을 할 수 있는 전주영화제작소가 구 보건소 자리에 들어섰다. 24억원 이르는 색보정장비를 비롯한 DI, HD 영상편집 시설들의 활용을 위해 현재 촬영중인 <버거킹 살인사건> (감독 홍기선), <대니보이> (감독 이창열) 등 여러 편의 영화가 줄을 서고 있다. 그리고 이 건물 안에 영화라이브러리라 할 수 있는 디지털 독립영화관까지 들어섰으니 이제 전주는 영화인프라로서의 '종합세트'가 거의 완결된 셈이다. 대니보이> 버거킹>
여기 영화판을 감싸고 있는 외연으로서 전주대와 우석대의 영화학과, 전북독립영화협회, 전북비평포럼 등이 영화를 만들고 또 토론하며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비빔밥의 오방색 나물처럼 말이다. 천년 역사의 숨결에서 가장 현대적인 문화장르에 깃대를 세워 '영화, 전주!'라는 파워 브랜드를 만든 복된 자리에서 한바탕 비비는 일만 남았다. 그렇다. 오래된 것만이 문화유산은 아니다. 문화콘텐츠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신귀백 문화전문객원기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