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게 잘 익은 은행나무길을 늙은 부부가 걸어간다. 그 중에 아직도 잎새가 푸른 은행나무를 발견한 할머니가 '은행나무도 수컷은 철이 늦게 드나보다고' 혼잣말처럼 두런거린다. 할아버지는 '철들면 그때부터는 볼 장 다 보는 거라고' 못 들은 척한다.
시 한 편을 읽고 나니 어렴풋하게 하나의 장면이 떠오른다. 먼 훗날 혹은 그 언젠가 나에게도 곧 다가올 일일 것이다.
그의 나의 예순일곱. 시도, 시인도, 여전히 뻣뻣한 어느 것들과 다르게 그의 시는 잘 늙어간다.
정양 시인의 시집 「철들 무렵」(문학동네)이 나왔다.
2부로 구성된 시집 중 1부에 실린 40편의 시는 모두 소재와 제목을 24절기와 세시풍속에서 따왔다. '얼다 녹은 냇물에 / 살얼음 낀다 살얼음 밟듯' 목숨 걸고 봄이 오는 입춘에서부터 우수, 경칩, 입동, 소설, 대한에 이르기까지, 일 년 열두 달 사계절을 아우르는 시간의 흐름과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자연의 변화가 펼쳐지고 우리네 삶의 풍경이 정겹게 살아있다.
문학평론가 홍용희씨는 "「철들 무렵」은 주로 세시풍속의 전통과 이에 상응하는 인간 삶의 문화와 자신의 생활감각을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일상 속의 '세속적 시간'의 지배 속에서 우주적 근원의 '신성한 시간'을 깨우고 재생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하여 세속화된 현실의 성화를 통해 신생의 계기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시풍속의 문화현상은 생명공동체의 대동적 삶. 세시풍속에 관한 시적 탐구는 인간 삶의 본질을 각성시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시인은 "세월과 사이좋게 동거하면서 관대해지거나 불화하며 초조해지는 사람들의 일이 이 세상에 명절이니 이십사절기니 기타 여러 속절(俗節) 같은 마디를 만들었을 테고 농경문화가 주눅들어 버린 요즈음에 그것들을 깜빡깜빡 잊어먹긴 해도 그게 다 우리네 삶의 끈이었거니 싶어 그 마디들을 새삼 추슬러보았다"고 했다.
2부는 삶에 대한 성찰을 담은 시편들로 채워졌다. '온갖 폼 잡고 죽는' 것도 '다 술잔으로 강물 재려는 것 아니냐고 / 탁 까놓고 안간힘 하다 가는 게 / 그나마 사람답지 않겠냐고', 그저 '느릿느릿 걷는 부끄러운 목숨'이라고 나직하게 고백하는 시인의 목소리는 치열한 생의 한 시기를 통과하고 이제는 삶을 관조하는 통찰과 달관의 음성. 인생이 빚어낸 생의 지혜에 다름 아니다.
"세월을 웬만큼 탕진해버린 늘그막에 그 세월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울 때가 많다"는 시인. 잊혀지는 게 세월 탓이라면 영영 잊혀지지 않는 것들 또한 세월 탓일 것이다.
김제에서 태어난 시인은 1968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돼 등단했다. 현재 우석대 문예창작과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